우리는 모두 번역가다
우리는 모두 번역가다. 타지의 언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만이 아니라 일상의 무수한 표정과 기분, 눈빛과 기류를 나름의 언어로 받아들이는 번역가다. 황석희의 책을 읽으며 가장 강하게 다가온 사실이다. 누군가의 말을 이해하는 순간부터 아침 공기의 냄새에서 계절을 해석하는 일까지, 결국 삶은 번역의 연속이다. 나는 그 말에 오래 머물렀다.
황석희는 영화 번역가다. <데드풀>, <보헤미안 랩소디>, <아바타: 물의 길> 같은 작품을 번역한 그의 이름은 영화가 끝날 즈음 스크린에 반짝 떠오른다. 그때까지 기다릴 일도 없겠지만. 이상한 일이다. 감독도 배우도 아닌데. 자막 하나로 영화의 결이 달라진다. 이 책은 번역가라는 직업의 무게와 즐거움, 그리고 그 너머의 일상을 솔직하게 풀어놓았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단순히 직업인으로서의 고백이 아니라, 어떻게 ‘번역하며 살아가는가’에 대한 사유로 이어진다.
'실수는 누구나 하지만 인정하고 고치는 건 쉽지 않다. 늘 자존심의 문제거든.' 그는 영화 번역에서의 오역을 예로 들며 이리 고백한다. 하지만 그 말은 번역만의 이야기는 아니겠지. 우리 삶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관계 속에서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는 일은 언제나 자존심과 맞닿아 있으니까. 이 대목을 읽으며 언젠가 아이가 커서 내게 묻는다면 이렇게 말해주겠다 다짐했다. 아빠는 반성에 자존심 같은 거 없다고. 번역이 언어를 옮기는 일이라면 반성은 관계를 옮기는 일일 것이다.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마음은 상대에게 옮겨지고 서로는 조금 더 가까워진다.
그의 글에는 번역가로서의 자부심이 곳곳에 배어 있다. '내가 번역했다는 것 따윈 몰라줘도 상관없다. 누군가의 인생 영화를 내가 번역할 수 있었다는 감사함과 뿌듯함이면 충분하다.' 이 문장에 나는 직업에 대한 태도의 본질을 다시 생각했다. 우리는 대개 성과나 인정, 눈에 보이는 결과를 좇는다. 그러나 그는 번역가라는 자리를 행운이라 부른다. 관객들이 좋아해 주는 영화에 자신이 참여했다는 사실, 그 우연한 기회를 감사하게 여기는 태도. 그것이야말로 오래 버티게 하는 힘 아닐까. 내가 하는 일에도 같은 시선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는다. 성과보다 과정, 인정보다 감사.
황석희는 번역을 ‘집’에 비유한다. '자막은 영화 번역가가 사는 집이다. 그 작은 집에서 번역가를 내쫓아봐야 남는 건 온기 없이 텅 빈 집뿐이다.' 이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자막 속에는 분명히 번역가의 숨결이 깃든다. 아무리 자신을 지워내려 애써도 그 언어에는 해석자의 체온이 배어 있다. 이 비유를 곱씹으며 글쓰기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가 어떤 책을 읽고 어떤 문장을 골라내는가, 그 자체가 이미 나의 번역이고 나의 집이다. 누군가 내 글을 읽을 때 보이지 않게 스며드는 온기는 결국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가와 닿아 있을 테니까.
책에서 가장 큰 울림을 준 대목은 '우리는 모두 번역가'라는 선언이었다. 삶의 장면들은 번역의 연속이다. 연인의 짧은 메시지를 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하는 일, 직장 상사의 표정을 서로 다르게 받아들이는 일, 아이의 침묵에 담긴 의미를 추측하는 일. 번역이란 결국 오역과 의역을 반복하며 가까스로 상대의 마음에 다가가는 과정이다. 영화에서는 정역이 필요하겠지만 일상에서는 그 오역조차 나름의 재미가 된다.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내 일상을 어떻게 번역해 왔는가. 혹시 자존심과 두려움 때문에 오역을 정정하지 못한 건 아니었을까.
'과민성 이죽거림과 비아냥을 습관처럼 손가락과 입에 달고 산다… 우리는 갈수록 잔인해지고, 아니다, 그것만도 못하게 비열하고 저열해진다.' 언어가 무기가 되어가는 세상에서 그는 번역가로서 언어를 다루는 윤리를 강조한다. 이 말은 번역가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니겠지. 우리 모두는 언어를 쓰는 순간 번역가이자 창작자이기도 할 테니까. 말은 언제든 칼이 될 수 있고 동시에 다리가 될 수 있다. 내가 쓰는 말들이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무기가 되지 않도록 그는 끊임없이 경계한다.
『번역: 황석희』는 직업인의 회고록이자, 일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사유집이다. 나는 책을 덮으며, 번역은 결국 삶을 대하는 태도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 정확하게 옮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의역으로 때로는 오역으로라도 서로를 이해하려 애쓰는 것. 그 불완전함 속에 인간다움이 있다.
나는 여전히 많은 순간을 잘못 번역한다. 아이의 표정에 담긴 뜻을 잘못 읽어낼 때도, 동료의 말을 오해하기도, 내 마음조차 엉뚱하게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두렵지 않다. 다시 물으면 된다. 상대가 눈앞에 있으니까.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이 결국 번역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모두 번역가다. 완벽할 수 없기에, 오히려 더 다정해야 하는 번역가. 언젠가 어디에선가 누군가 이 글을 읽으며 그 안에 작은 온기를 발견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겠다. 그렇기에, 나도 참 괜찮은 일을 하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