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다시 돌아오는 일
도망치듯 떠도는 마음도 언젠가 제자리로 회귀한다는 것을 프래니의 항로를 통해 배웠습니다.
샬롯 맥커너히의 『마이그레이션』은 어찌 보면 기후소설이자 항해기이지만, 제게는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했던 한 인간이 자기 몫의 사랑을 되찾는 기록'으로 읽혔습니다. 작가는 호주 시드니에서 태어나 시나리오를 공부했다는데요. 이야기를 밀어 올리는 힘이 굵고 선명합니다. 멸종, 바다, 기후라는 거대한 의제를 앞세우면서도 결국 독자의 가슴에 남기는 것은 ‘한 사람의 결심과 회귀’ 인데요. 그녀는 이 작품을 통해 계속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떠나고 무엇으로 살아남으며 어디에 속하려 하는가.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는 이야기만이 아니라 자연이 인간을 기어이 끌어안아 회복시키는 이야기에 대해서 말이죠.
주인공 프래니는 북극제비갈매기의 마지막 이동을 따라 남극으로 가기로 결심합니다. 언제 처음 이 여정을 꿈꾸기 시작했는지 자신도 모른 채 어느 순간 그 꿈이 삶을 통째로 집어삼켰다고 고백하죠. 저는 이 대목에서 계획한 미래보다 더 오래 품을 수 있는 것이 본능이라는 사실을 떠올립니다. 삶에는 계산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충동의 때가 있죠. 그 충동이 무모함일 때도 있지만 가끔은 살아내는 방향으로 우리를 밀어 올립니다. 프래니의 의지는 '끔찍하리만큼 강력'했고, 그 과잉의 힘이 그녀를 바다로 밀어 넣었습니다. 누군가는 무책임이라 말하겠지만 저는 그 과잉이야말로 상실을 건너는 인간의 근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프래니는 자신의 삶에 '남겨질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합니다. 아이도, 이름을 남길만한 업적도 없었죠. 그 고백은 무력해 보였지만 이상하게 단단했습니다. 영향력이란 것은 무엇을 남기느냐로만 측정되지 않고 '세상에서 무엇을 얻었는지'로도 측정된다는 문장을 만나며 저는 오래 멈춰 서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삶을 합계로 이해합니다. 무엇을 이뤘고, 무엇을 남겼는지. 하지만 이 책은 반대로 묻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받아들였는가. 프래니를 빌어 이야기하는 바다의 감각, 새의 비상, 타인의 연약함, 그리고 본성의 야생성 같은 것들. 저는 이 질문을 제 일상으로 가져왔습니다. 오늘 하루, 내가 나의 세계로부터 배운 한 조각이 있다면 그게 바로 삶의 총합이라고.
프래니의 남극을 향한 항해는 순탄치 않습니다. '내 새들의 길을 보여주던 빨간 불빛'을 잃고, 폭풍 속에서 길잡이를 놓치는 장면에서 저는 프래니의 말보다 침묵이 더 크게 들렸습니다. 삶의 어느 시절에나 나침반이 고장 나고, 젖은 지도에 한탄하며, 함께 선 데크가 기울기도 하죠. 그때에 우리가 붙잡게 되는 것은 기술이나 용기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서로에게 시기하며 상처를 내기도, 누구는 화를 삼키고, 누구는 등을 다칩니다. 이 무너짐의 순간들이 오히려 공동체를 만들어냅니다. 저는 여기서 ‘구원을 수행하는 평범함’을 보았습니다. 선동하는 위대한 구호가 아니라 괜찮냐고 묻는 선의, 등을 토닥이는 손, 키를 대신 잡아주는 동료. 거대한 재난의 시대에 우리가 쥘 수 있는 것은 이런 작고 구체적인 몸짓들이 아닐까요.
프래니의 내면을 비추는 또 하나의 거울은 할머니에 대한 기억입니다.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조용히 나를 사랑해 준' 사람. 그 사랑을 제때 알아보지 못했다는 자책은 바다의 소금기처럼 오래 남아 그녀를 자극합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며 내 삶의 조용한 사랑들을 돌아보았습니다. 하루의 고단함에도 내색하지 않고 자식들의 끼니를 걱정하셨던 어머니, 늦은 귀갓길에도 따스하게 반기는 가족, 번번이 떨어지는 면접에도 곁을 내어주던 친구들. 우리는 종종 사랑을 찾으러 먼바다로 나가지만 실은 그 사랑이 우리를 육지로 되돌리는 등대가 됩니다. 잃어버려서야 보이는 것들. 너무 가까워 오래 보지 못했던 것들. 프래니의 항해는 사라진 것에 대한 쫓김이면서 이미 받은 것을 뒤늦게 수납하는 여정이기도 했습니다.
이 소설에서 바다는 대상이 아니라 환경이며, 환경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우리는 바다에 대해서 전혀 몰라요.'라는 문장은 무지의 고백이 아니라 경외의 선언에 가깝습니다. 바다는 산소를, 이동을, 계절을, 그리고 이야기의 박동을 제공합니다. 프래니는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신을 이상하게 여기지만 저는 그 감정이 두려움의 부재가 아니라 사랑의 과잉이라고 읽었습니다. 두려움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사랑이 그것을 덮을 만큼 커졌기 때문에 가능한 항해. 우리가 무언가를 지킬 때 흔히 드는 자세이지요. 무릎이 떨리지만 계속 서 있는 것. 울컥하지만 계속 말하는 것.
'삶에 대한 단서'를 찾아 나선 프래니가 마지막에 껴안은 단서는 어쩌면 남극도, 북극제비갈매기도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저는 그 단서를 이렇게 적어두었습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서 살아간다는 것. 떠남은 끝이 아니라 귀환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 영향력은 남김보다 배움에 가깝다는 것. 그리고 희망은 상황의 낙관이 아니라 태도의 지속이라는 것. 이 네 개의 단서는 저를 일상의 뭍으로 다시 데려왔습니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아이가 문을 쾅 닫는 소리를 들을 때도, 회사에서 본질을 빗겨 난 보고서를 마주하는 순간에도 나는 지금 무엇을 배우고 있는가, 무엇을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샬롯 맥커너히는 『마이그레이션』에서 멸종을 말하지만, 더 깊게는 ‘살아있음의 윤리’를 쓴다고 느꼈습니다. 세계가 붕괴하는 소리 속에서도 인간이 인간으로 남기 위해 필요한 감각들을 한 사람의 목소리로 끝까지 밀고 갑니다. 그래서 이 소설의 비극은 절망으로 닫히지 않습니다. 마지막 얼음 조각 위에서 비상하는 새들과 같이, 희망은 대상이 아니라 방향으로 남습니다. 누구의 마음에도 오래 머물지는 않지만 필요할 때면 언제든 찾아와 길을 가리키는 바람처럼요.
이 소설을 통해 제 삶 속에 문장을 하나 더 기우려 합니다. 무엇을 남길까 걱정하는 대신 오늘 무엇을 제대로 받아들일 것인가를 묻는 일. 내 힘으로 막을 수 없는 거대한 변화를 두려워하기보다 적어도 내 일상에서 소멸을 늦추는 선택을 하는 일. 숙제로 지친 아이의 피곤한 등을 가볍게 두드리고, 창문을 열어 바람의 냄새를 들이는 일. 작지만 지속 가능한 태도로 세계와 다시 연결되는 일.
결국 프래니가 찾아 헤맨 것은 남극이 아니라 다시 돌아올 마음이었을 겁니다. 떠돌던 마음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때 우리는 비로소 자기 몫의 사랑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바다의 호흡처럼 우리 안팎을 오가며 삶을 조금씩 바꿔 놓습니다. 오늘의 저는 그 호흡을 따라 제가 받은 것들을 천천히 받아들이는 쪽으로 노를 젓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각자의 바다에서 자기만의 단서를 발견하기를. 우리는 아직 돌아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