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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거짓말이 중요하다 - 애슐리 엘스턴

첫 번째 거짓말의 각도

by 세잇
우리가 서로에게 건네는 첫 문장은, 사실상 첫 번째 거짓말의 각도다.


애슐리 엘스턴의 『첫번째 거짓말이 중요하다』는 제목부터 선언에 가깝다. 거짓말은 진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야 하고, 불필요한 가지를 만들지 말아야 하며, 무엇보다 첫 거짓말이 모든 궤도를 정한다. 나는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나와 당신의 문장은'이라는 내 연재 제목이 갑자기 기밀문서처럼 보였다. 첫 문장으로 우리는 서로의 신뢰를 정렬한다. 그러나 그 신뢰의 첫 좌표가, 대개는 아주 작은 각도의 허구에서 출발한다. 이름, 표정, 목소리의 온도, 어느 도시에서 왔는가 같은 자잘한 자기소개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이 미세한 각도를 직업으로 삼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일상으로 삼는다.


작가인 애슐리 엘스턴은 오랫동안 결혼식 사진사로 일했단다. 축복의 가면과 진심의 눈물이 같은 프레임에 겹치는 현장에서, 아마도 ‘연출된 진실’의 매뉴얼을 몸으로 익혔을 것이다. 그런 그가 YA(Young Adult) 소설들로 작가의 기반을 닦은 뒤 성인 스릴러로 건너오며 만든 이 소설의 주인공은 이름을 갈아 끼우는 사람이다. ‘에비 포터’는 작업용 가면이고 진짜 이름인 ‘루카 마리노’를 훔쳐 쓴 누군가가 등장하는 순간, 이야기의 바늘은 본격적으로 피를 찾기 시작한다. 미지의 보스 '스미스 씨'와의 머리싸움, 과거와 현재의 교차, 지시가 도착하던 사서함—이 작품에 리즈 위더스푼이 붙인 '스릴러에 기대하는 모든 것을 갖춘'이라는 찬사는 정확하다. 그러나 내가 골라 밑줄을 그은 건, 추격전의 속도가 아니라 그 속도를 가능하게 하는 마음의 규칙들이었다.


예컨대 이런 규율. '내가 창조한 지금의 나는 캐묻지 않는다. 불필요한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녀는 기억을 만들어낼 때도, 망가뜨릴 때도, 질문을 줄인다. 가면으로 살려면 질문은 위험하다. 질문은 관계의 시작이고, 관계는 기억을 만든다. 기억은 흔적을 남기고, 흔적은 도망을 어렵게 만든다. 이 문장을 나는 내 일상의 반대편에 놓고 오래 바라보았다. 우리는 친밀을 얻기 위해 질문을 늘리지만, 어떤 날들은 생존을 위해 질문을 줄여야 한다. 그것을 직업적으로 수행하는 주인공을 보며 나는 내 안의 조심성을 바라보게 된다. 오늘의 내가 캐묻지 않기로 선택한 것들. 그게 곧 내가 지키고 싶은 것들일지도 모른다.


작품에서 기억을 관리하는 방식도 흥미롭다. '열쇠를 꽂기 전에 제자리에서 빙그르 한 번 돈다'는 단순한 동작으로 루틴의 기억을 각인시키는 기술은 스릴러 한복판에서 느닷없이 생활철학이 된다. 잊지 않기 위해서는 변칙이 필요하다. 관계도 그렇다. 매일 같은 말로 사랑을 확인하면 어느 순간 기억은 모래가 된다. 작은 변칙— 지나치던 저녁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같이 본다든가, 지갑에 오래 넣어둔 여행지의 영수증을 꺼내 한 번 웃는다든가—이 우리를 그날로 되돌려놓는다. 엘스턴은 속도의 미학만이 아니라 기억의 기술을 가르친다. 긴장감이란 결국 잊지 않음의 또 다른 이름이니까.


가난의 감정선도 정확하다. '엄마는 단지 더 큰 평수의 집을 원한 게 아니었다. 다른 방식의 삶을 원했다.' 이 문장에서 집은 평수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방식이다. 식재료 값이 모자라지 않을 삶, 내가 사라진 뒤 아이가 굶지 않을 삶. 이 소박하고도 근본적인 갈망은, 주인공이 왜 이렇게까지 치열하게 자기 자신을 가공해야 하는지의 윤리적 배경이 된다. 누군가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때론 충분치 않다'는 잔혹한 사실을 너무 일찍 배운다. 그럴 때 사람은 두 가지 언어를 익힐 수밖에 없다. 하나는 세상과 협상하는 언어(가짜 신원, 조심성, 첫 거짓말 같은), 다른 하나는 스스로를 부러뜨리지 않기 위한 내면의 언어(단단함, 애도의 사용법, 떠나는 법). 이 소설은 두 언어의 문법을 다 가지고 있지.


그리고 직업윤리. '자네 자신과 작업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해야 해. 자네는 그 가족의 일원이 아니야. 자네는 잠깐 스쳐 지나가는 유령일 뿐.' 처음엔 냉혹한 문장처럼 보였지만 나는 이 냉혹함이 경계의 기술이라는 걸 이해했다. 우리는 자주 남의 세계에 무단 입국한다. 친절이란 이름으로, 선의란 이유로, 때론 사랑이라는 위신으로. 그러나 모든 세계에 영주권이 있는 건 아니다. 내가 타인의 집에 머무는 시간은 어쩌면 유령처럼 투명해야 할 때가 있다. 열쇠를 맡기고도 마음의 방문을 닫아둘 권리가 각자에게 있다는 것을, 이 문장은 정확하게 일러준다.


배신을 겪고 난 뒤의 내면을 작가는 조목조목 적나라하게 분해한다. 분노, 실망, 쓰라림—그 감정들이 '내가 각오한 것보다 더 아프다'는 고백은, 예측 불능의 고통에 대한 생생한 메타 서술이다. 우리는 늘 '이 정도면 감당 가능'이라는 허상과 함께 산다. 그러나 고통은 사전 합의를 파기하는 데 도가 튼 존재다. 그래서 주인공은 시간을 단위로 감정을 경영한다. “나는 ‘우리의 가능성’을 애도할 시간을 5분 준다.” 불발된 미래를 슬퍼하는 5분. 그리고 다시 자신의 세계로 복귀한다. 이 5분은 냉혈이 아니라 다정함이다. 가능했던 세계를 완전히 지워버리지 않고 온전한 장례를 치를 시간을 내주는 것. 그 애도의 제한 시간은 내 삶에도 필요했다. 실패와 오해, 오판과 미련에 붙잡히지 않기 위해 나는 나만의 5분을 만들었다. 주방 타이머를 돌려도 좋고, 엘리베이터가 15층을 오를 때까지 울어도 된다. 중요한 건 애도의 형식이 아니라,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연습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가는 유령'이라는 자기규정은 슬프도록 해방적이다. 유령이 되겠다는 건 사랑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망령이 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타인의 세계에서 억류된 영혼으로 살지 않겠다는 선언. 사랑하고도 떠날 수 있고, 떠난 뒤에도 사랑할 수 있다. 그건 이 소설이 보여주는 윤리의 형태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의 배후에는 언어의 민첩함이 있다. '샴페인에 일찍이 어딨어.' 실패한 축하의 아침에 내뱉는 이 농담은, 시간의 독재에 대한 가벼운 반란 같다. 기쁨은 정시 출근하지 않는다. 늦게 터진 샴페인은 샴페인이 아니냐는 듯이. 엘스턴은 이런 뉘앙스들을 빠르게 툭툭 던진다. 덕분에 서사는 무겁게 가라앉지 않는다. 주인공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웃음을 전략처럼 사용한다. 웃음은 방탄유리다. 총알을 막지는 못하지만, 파편을 둔화시킨다.


이야기를 덮으며 나는 이런 결론에 닿았다. 첫 번째 거짓말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결국 첫 번째 약속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개 타인에게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에게 먼저 약속을 건다. '나는 오늘 이 이름으로 살아보겠다.' '나는 이 가능성에 대해 5분만 슬퍼하고 돌아오겠다.' '나는 당신의 세계를 사랑하지만, 거기에 눌러살지는 않겠다.' 이 약속들이 모여 우리의 문장이 된다. 그러니 첫 문장을 신중히 택하자. 그것이 첫 거짓말이든, 첫 다짐이든, 결국 우리의 하루를 기울이는 건 그 각도다.


그리고 이 각도는 나와 당신 사이에서도 작동한다. 나는 지금 당신에게 내 문장을 건넨다. 당신이 건네올 문장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혹시 오늘, 현관문을 잠그고 나오며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아보는 건 어떨까. 우리도 그 작은 변칙으로 이 순간을 오래 기억할 수 있을지 모른다. 가능했던 세계들을 5분 애도하고, 이름을 다시 챙겨 들고, 누군가의 세계를 지나가되 망령으로 남지 않기를. 우리는 서로의 삶에선 잠깐 스쳐 지나가는 유령일지라도, 서로의 문장 속에서는 조금 더 오래 머물 수 있으니까.


그게 내가 이 책에서 얻은 잔잔한 깨달음이다. 첫 문장이 우리의 진실을 기울인다면, 그 기울기를 감당하는 법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그러니 오늘의 첫 문장을, 조금 더 다정하게, 조금 더 정확하게, 그러나 필요하다면 약간의 거짓을 허락하며—그렇게 시작하자. 첫 번째 거짓말이 중요하니까. 첫 번째 다짐도 마찬가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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