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 없지만, 없다고 말하지도 못할
유한함을 받아들이는 순간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기술이 되고
그 기술을 매일 연습하는 것이 삶을 빛낼 작은 의식이 된다.
별의 딸이 들려주는 지상의 편지
사샤 세이건의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를 펼치고 묘한 기시감과 마주한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누군가가 드디어 입을 열어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달까. 천문학자 칼 세이건과 과학 저술가 앤 드루얀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거대한 우주를 탐험하던 아버지의 망원경을 180도 돌려 일상이라는 가장 가까운 우주를 들여다본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뉴욕대학교에서 극문학을 전공했다는 사샤 세이건에게는 과학적 정확성과 문학적 상상력이 자연스럽게 공존하는듯 하다. 그녀는 부모의 명성에 눌리지 않고 오히려 그 유산을 자신만의 언어로 번역해 낸다. 이 책은 회고록도 자기 계발서도 아니다. 차라리 '우주적 일상 사용법'에 가깝다. 종교 없는 가정에서도 삶을 신성하게 만드는 방법, 취약함을 통해 더 깊은 연결에 도달하는 기술, 매일을 작은 축제로 만드는 의식의 철학을 담고 있다.
사랑이 자신에게 건네는 최소한의 예의
'우리 집은, 종교는 없어도 결코 냉소적이지는 않았다.' 이 문장에서 시작된 사샤의 고백은, 신앙 없이도 경이로움을 잃지 않는 삶의 기술에 대한 섬세한 안내가 된다. 아버지 칼 세이건이 '증거의 부재는 부재의 증거가 아니다.'라고 가르쳤을 때, 그것은 단순한 과학적 회의주의가 아니었다. 확실하지 않은 것들 앞에서 성급한 단정을 내리지 않는 지혜, 모르는 것을 인정하는 용기, 그리고 그 모름을 인지한다는 겸손을 출발점으로 삼는 성숙함이었다.
나는 이것을 '회의주의란 사랑이 자신에게 건네는 최소한의 예의'라고 부르고 싶다. 진실을 사랑한다면 그것을 함부로 규정하지 않는 것, 세상을 사랑한다면 그것의 복잡성을 인정하는 것. 얼마 전 오랫동안 확신했던 한 가지 생각을 뒤집어야 하는 상황이 있었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겠구나.' 그 한마디를 속으로 중얼거리는 데 이틀이 걸렸다. 인정하고 나니 무너질 것만 같았던 세상은 조금 넓어졌다.
호기심에 대한 그녀의 비유는 특히 매력적이다. '호기심을 품고 세상을 탐구하는 일은 퍼즐을 완성하는 것보다는 조개껍데기나 우표처럼 작고 예쁜 물건들을 모으는 수집가가 되는 것과 비슷했다.' 완벽한 해답을 찾으려는 조급함 대신 내가 발견한 작은 것들을 소중히 모아가는 마음. 지엽적인 질문에도 '우리가 우주에서 어떻게 존재하느냐를 슬쩍 엿볼 수 있는 틈'이 된다는 통찰은, 일상의 사소한 궁금증들이 얼마나 소중한 철학적 단서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나도 한때 잡다한 질문들을 쓸모없다고 생각했지. 왜 첫눈은 소리를 죽일까, 왜 봄 냄새는 흙이 아니라 빛의 냄새처럼 느껴질까. 사샤는 말한다. 작은 조각이 다른 것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 그 말을 듣고 나니 내 질문들은 마치 투명한 비늘처럼 느껴졌다. 따로 보면 사소할지 모르겠으나 모이면 삶이라는 한 마리의 생명체가 된다.
진실에 몸을 열어두는 자세
이 책에서 빛나는 통찰은 취약함에 대한 재해석이다. '결국은 우리의 취약함이 우리가 무언가 더 깊은 것에 다가갈 수 있게 해 준다. 사랑도 그렇고.' 우리는 흔히 강함을 성숙의 징표로 배우지만, 사샤에게 진정한 성장은 다른 얼굴을 한다.
작년 이맘때 즈음, 한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실수를 저질렀지. 터무니없이 잘못된, 별 거 아닐 것이라 생각한 부분에서 생긴 비용이었는데, 변명을 늘어놓고 싶었더라니. 샤샤의 문장이 나를 돌려세운다. '오류를 기꺼이 인정한다면, 예측이나 선입견을 과감히 놓아버릴 수 있다면, 상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에 다가갈 수 있다.' 취약함은 무방비가 아니라 진실에 몸을 열어두는 자세다. 실수를 솔직히 털어놓았고, 예상과 달리 빠르게 결정하고 해결할 수 있었다. 취약함은 균열이 아니라 빛이 들어오는 창문이었다.
'삶이 유한함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게 아니라, 삶이 유한하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느낄 수가 있었다.' 이 깨달음은 죽음에 가까이 다가서야 얻을 수 있는 성숙한 지혜이지 않을까. 끝이 있음을 깨달을 때에야 기쁨을 더욱 선명하게 인식한다는 역설. 마침표가 있어 문장이 문장이 되듯, 끝이 있어 지금이 선명해진다. 두려움을 미루는 걸 성숙이라 착각했다. 사샤는 두려움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을 '어른이 되는 관문'이라 부른다. 지식은 축복이며 때로 그 두려움을 마주하고 통과해야 기쁨에 닿을 수 있다.
어제와 내일을 맞닿게 하는
종교적 신앙이 없어도 삶을 신성하게 만드는 방법이 있다. 사샤는 가족과 함께 만든 작은 의식들을 통해 이를 보여준다. 나는 이것을 '시간을 접는 기술'이라고 부르고 싶다. 어제와 내일을 맞닿게 하는 상상. 의식.
'언젠가 딸아이가 크면 우리는 한여름에, 어쩌면 하짓날에 집밖으로 나가 어딘가 오래전부터 있었던 아름다운 곳으로 갈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보는 빛이 아주 먼 옛날에 멀리에 있는 별을 떠났을 때는 이 세상이 어떠했을까를 상상해 본다.'
유난히도 무더웠던 올여름. 조금 선선해진 틈을 타 아이와 함께 나선 산책길의 끝에, 휴게공간에서 팔던 컵라면의 뚜껑으로 부채질을 해가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주변의 불빛을 가리려고 손을 터널 모양으로 만들어 별을 보기도 하고. 사샤가 딸과 함께 상상한다던 장난을 혼자 따라 했다. '이 빛은 언제 떠났을까.' 공기를 들이마시면서는 이런 생각을 했다. 지금 내 허파에 들어온 분자 몇 개는, 아주 오래전에 칼 세이건의 웃음 속에서 튀어나왔을지도 모르지. 알 수 없지만,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가느다란 연결감이 뜨거운 여름밤을 식혀주었다.
나에게도 비슷한 의식이 있다. 얼죽아이지만 첫눈 오는 날이면 창가에 앉아 따뜻한 차와 함께 눈구경을 하는. 그 순간에는 어린 시절 마당에 내려앉는 첫눈을 보며 설렜던 마음을 되살린다. 시간이 직선이 아니라 원이라는 걸, 과거와 현재가 눈송이 하나로 연결될 수 있다는 걸 몸으로 느낀다. 이런 작은 의식들의 목적은 연결감을 느끼기 위해서다. 의식은 시간을 접는 기술이다. 어제와 내일을 손바닥에서 맞닿게 하는.
기쁨, 그 자연스러움
'어쩌면 우리는 봄을 사랑하게끔 진화했는지도 모른다. 봄이 왔다는 것은 이제 위험을 벗어났으며 얼어 죽거나 굶주릴 가능성이 줄어들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문장에 지난봄을 떠올린다. 겨우내 앙상했던 나무에 연둣빛 생명이 돋아나는 걸 보며 느낀 그 묘한 안도감. 그것이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수만 년 진화의 기억이었다니.
샤샤 세이건은 과학과 시의 경계에서 반짝이는 통찰을 건넨다. 봄의 기쁨은 신앙과 무관하게 누구에게나 허락된 축제라고. 생각해 보니 가끔 우리는 이유 없는 기쁨에 불편해하지 않나. 왜 봄을 사랑하는가. 왜 기쁜가. 근거부터 찾으려 들지. 그러나 봄은 근거의 반대편에서 핀다. 이유가 없는 게 아니라, 이유가 너무 많아서 셀 수 없을 뿐이다.
우리는 여기에 있었다
'우주에 어떤 비밀이 숨어 있든 우리가 태어났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우리는 여기에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살았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 거대함의 일부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살아 있음의 모든 위대함과 끔찍함, 숭고한 아름다움과 충격적 비통함, 단조로움, 내면의 생각, 함께 나누는 고통과 기쁨. 모든 게 정말로 있었다.'
이 문장에서 묘한 위안을 본다. 때로는 내 삶이 너무 작고 하찮게 느껴질 때가 있으니까. 거대한 우주 앞에서 먼지보다도 작은 존재라는 생각에 허무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사샤는 말한다. 바로 그 작음이 기적이라고. 우리가 이 광대함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축하받아 마땅한 일이라고.
'우리처럼 작은 존재가 이 광대함을 견디는 방법은 오직 사랑뿐이다.' 이 사랑은 감정의 격정이라기보다 반복되는 약속의 습관에 가깝다. 매일의 작은 의식들, 누군가의 이름을 또렷이 부르는 일, 오늘의 호흡을 의식하는 것, 이유 없이 작은 기쁨을 축하하는 것들이 모여 사랑이라는 존재 방식을 만든다. 사랑은 한 번의 격정이 아니라 수많은 작은 의식들의 다른 이름이다.
별빛을 받아쓰는 존재
결국 이 책은 의식에 관한 책이다. 종교적 의무가 아니라 인간다운 반복. 하짓날의 별을 보러 나가는 일, 첫눈 오는 날 차 한잔을 들고 둘 다를 음미하는, 꽃봉오리 앞에서 생의 기쁨에 탐미하는 잠깐의 침묵. 이런 것들이 삶을 기념하게 만든다. 거창한 축하 대신 날마다의 축복.
사샤 세이건은 거대한 것을 작게 줄이지 않았다. 대신 작은 것을 통해 거대한 것을 만지게 하지. 우리는 별의 먼지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머리로만 알던 내가 숨을 고르고 손을 모아 어둠을 만들며 비로소 이해했다. 그리고 그녀의 문장과 밤하늘이 함께 내려주었다.
기회가 된다면 오늘 밤도 작은 의식을 치를 것이다. 창밖을 바라보며 별빛이 만든 아주 오래된 시간을 생각할 것이다. 그 빛이 떠날 때 지구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그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사랑하고 떠났을까를 상상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한 몸 누인 작은 방에서 이 거대한 우주의 일부로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을 축하할 것이다.
그러니 오늘 밤 불을 하나 줄이고 손으로 작은 터널을 만들어보자. 오래된 빛이 도착하는 소리를 듣듯이, 천천히 호흡해 보자. 어쩌면 그 공기 속 어딘가에, 우리보다 먼저 떠난 누군가의 웃음이 아주 얇게, 그러나 확실히 섞여 있을 것이다. 알 수 없지만, 없다고 말하지도 못할 그 가능성 위에서 우리는 서로를 부른다. 여기에 있었노라고. 그리고 사랑했노라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축하하고도 남을 이유가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