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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키 문구점 - 오가와 이토

누군가의 마음을 대신 적는다는 건

by 세잇
누군가의 마음을 대신 적는다는 건 목소리를 훔치는 일이 아니라 마음의 온도를 재어 그에 맞는 종이와 먹, 그리고 침묵까지 처방하는 일이라 믿는다.


오가와 이토의 작품을 읽을 때면 일상에서 치부될지 모르는, 사소한 의식들이 사람을 살리는구나 싶어진다. 1973년 야마가타에서 태어나 『달팽이 식당』으로 전 세계 독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진 작가답게, 그녀의 세계는 음식처럼 따뜻하고 문구류처럼 정밀하다. 요란한 사건 대신 삶을 지탱하는, 손가락 마디 사이 같은 기억을 꺼내어 보여주는 그녀의 작품들은 밥을 짓고 아이를 안거나 편지를 쓰는 일 모두가 '누군가를 잘 살아 있게 하는 기술'임을 일깨운다.


『츠바키 문구점』은 그 기술들 중에서도 가장 섬세한 한 가지, 마음을 대신 써주는 대필가의 이야기이다. 가마쿠라의 고즈넉한 바닷가에 자리한 츠바키 문구점은 겉으로는 평범한 문구점이지만, 실은 에도시대부터 여성 서사들이 가업으로 이어온 대필의 전당이다. 십일 대째 그곳에서 사람들의 간절한 마음을 대신 써 내려가는 주인공 포포의 이야기는, 디지털 시대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다정하게 속삭이는 듯하다.


먹 향기에 사로잡힌 아이와 운명

포포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먹에 대한 묘사다. '선대가 먹을 갈 때 흘러나오는 그 은은한,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향이 미치도록 좋았다'는 문장을 읽으며, 문장의 기원 같은 것을 보게 된다. 글쓰기는 단지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눈과 코, 손끝으로 배우는 일이라는 걸. 핏줄보다 먼저 배는 건 향기이고 이성이 굴복하는 건 손의 기억이라는 것.


엄한 할머니의 도구를 만지다가 창고에 갇히는 벌을 받으면서도 그 검은 덩어리가 '초콜릿보다도 사탕보다도 더 근사한 맛'일 거라고 확신했던 소녀. 그 확신이야말로 대필가로서의 운명을 예고하는 신호가 아니었을까. 때로 우리를 이끄는 건 논리적인 판단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이끌림일지니.


마음속 어둠에 별을 켜는 주문

바바라 부인이 가르쳐준 '반짝반짝' 주문은 이 책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법이지 않을까. '눈을 감고 반짝반짝, 반짝반짝, 그것만 하면 돼. 그러면 말이지, 마음의 어둠 속에 점점 별이 늘어나서 예쁜 별하늘이 펼쳐져.' 이 주문을 편지에 적용해 본다. 편지란 마음속 별자리를 그려 보내는 종이 위의 지도가 아닐까.


우리는 각자의 어둠을 가지고 산다. 그 어둠을 설득하는 건 논리보다는 리듬, 주장보다는 호흡일 때가 많지. '반짝반짝'이라는 유치할 만큼 단순한 리듬이 편지에서는 '안녕'과 '잘 지내'라는 어휘로 변주된다. 수신인은 그 리듬을 따라 마음의 밤길을 걸어오고, 편지란 결국 별빛의 배달이 된다.


진심이 사기일 수 있을까

대필이 사기냐는 포포의 질문에 할머니는 '자기가 직접 만든 것이 아니어도, 제과점에서 열심히 골라 산 과자에도 마음은 담겨 있어. 대필도 마찬가지야.' 라며 답하는 이야기에, 우리는 언어의 주인이 아니라 임차인이라 떠올려본다. 말에는 늘 누군가의 발자국이 앞서 있었고, 우리는 그 길을 조심스럽게 빌려 쓰니까.


제과점의 케이크가 내 손으로 만든 케이크보다 덜 진심일까. 생일을 축하하려는 마음이 케이크에 올라타는 순간, 그 표면의 광택은 내 기쁨의 윤택이 되지 않을까. 대필도 그렇겠지. 말에 능한 사람이야 스스로 굽고 장식하면 되겠으나, 그렇지 못한 이에게는 빵 굽는 사람의 손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로 인해 내 안의 사랑이 더 안전하게 도착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수도꼭지의 물방울

'슬픈 편지는 슬픔의 눈물로, 기쁜 편지는 기쁨의 눈물로 우표를 적셔 붙여라'는 선대의 가르침은 아름다운 동시에 불가능한 지점으로 읽혔다. 포포는 그래서 '수도꼭지의 물방울'로 타협하는데, 내게 이 장면은 성숙의 정의처럼 다가왔다. 진짜 눈물은 늘 준비되어 있지는 않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그 부재를 감추기보다 당장 있는 것으로 정성껏 대체하겠지. 어쩌면 진심이란 염분 농도가 아니라 머뭇거림의 시간일지 모르겠다. 수도꼭지의 물방울을 기다리는 그 짧은 사이. 그 사이가 우리의 예의일지도.


잃어버린 것보다 손에 남은 것을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 하기보다 지금 손에 남은 것을 소중히 하는 게 좋다'는 깨달음이 이 책에서 길어 올린 핵심이랄까. 이메일은 눈을 스쳐 지나가지만 편지는 손에 남는다. 접힌 자국, 우표의 질감, 글씨의 호흡, 봉투 안에 갇힌 공기의 냄새까지. 상실을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남은 것을 더 잘 잡을 수는 있을 테니까.


포포 역시 할머니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들 때문에 괴로워했지만 대필을 하며 할머니의 가르침들을 새롭게 이해하게 된다.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그것을 지우는 게 아니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일 수도 있겠다고.


등 뒤의 메모, 거울 장수

'자신에게는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언제나 자신보다 주위 사람이 더 많이 나를 보고 있다'는 문장에 오래 마음이 남았다. 대필가는 그래서 거울 장수이겠지. 의뢰인의 말 사이에 흘린 숨을 닦아 반짝이게 하고 보낸 이가 미처 보지 못한 자신의 뒷모습을 편지라는 거울에 비춰줄 테니.


이상하기도 하지. 나 대신 써준 문장을 읽고서야 비로소 내 마음이 내 마음을 알아보는 순간이란. 언어란 결국 혼자서만 쓰는 기술이 아니라 함께 보정하는 공예이겠구나.


마음의 온도를 조절하는 기술

포포가 편지를 쓸 때 신경 쓰는 모든 것들 - 조문 편지에는 옅은 먹색을, 첫사랑에게는 투명한 유리펜을, 거절 편지에는 굵은 만년필과 금강역사상 우표를 - 이 모든 것이 편지가 아니라 내겐 마치 처방전처럼 보였다. 그래서 이 책을 '문장의 약국'이라 부르고 싶어진다. 아픈 사람들의 증상은 제각각이겠지만 기본 원리는 같을 테니까. 상대를 존중하고 형식을 통해 감정을 안전하게 들여보내는 일. 정성은 수사학이 아니라 속도일 것이다. 빨리 건너뛰지 않고 끝까지 들어주는 속도.




이 책을 덮고 나면 자꾸 종이를, 펜을 만지게 된다.

누군가에게 오래 미루어 둔 말을 떠올리고 그 말의 경도를 정해 본다.

HB로는 부족하고, 4B쯤은 되어야 할 것 같은 날들이 있지.


그리고 짧은 주문을 되뇌어본다.

반짝반짝.

그러면 마음의 어둠에도 별이 늘어나고

길을 잃은 문장 하나가 빛에 붙들린다.


편지가 기적을 약속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바라는 그곳에 마음이 도착하리란 건 믿는다. 나는 그 용기가 좋다. 우리가 서로의 등을 보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편지는 등 뒤에 붙이는 메모 같으니까.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었고, 너에게는 이렇게 보이고 싶었어.'


『츠바키 문구점』은 그 메모를 조금 더 단정하게, 그러나 떨림이 남은 채 붙이는 법을 알려주었지.

늦었지만, 반짝반짝.

아주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도착하는 문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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