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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과 생각 - 정용준

문장 속에서 찾는 것은

by 세잇

책에 그어진 한 줄의 흔적이 삶이 되어

밑줄 긋는 것이 좋습니다. 그 문장이 몸과 마음에 천천히 스며드는 시간도 좋습니다.

정용준 작가의 『밑줄과 생각』을 펼치며 만난 문장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책을 읽으며 밑줄을 긋는 행위에 대해 이보다 아름다운 설명을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선릉산책』이라는 단편집으로 처음 만났던 정용준 작가. 『밑줄과 생각』은 오영수문학상과 젊은 예술가상을 동시 수상한 이력에 빛나는 작가가 15년간 소설의 안팎에서 쌓아온 사유의 기록이다. 37편의 산문을 통해 작가는 '읽기와 쓰기가 우리에게 주는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 책의 진짜 매력은 단순히 문학론이나 창작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작가는 문장과 밑줄을 통해 삶 전체를 관통하는 깊은 성찰을 펼쳐낸다.



문장 속에서 만난 삶의 진실들

밑줄이 그어지면 책은 책 이상이 됩니다. 단어와 문장에 그어진 한 줄의 흔적은 마음에도 그어져 있습니다. 문신처럼 흉터처럼 남아 내 삶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정용준 작가에게 밑줄은 단순한 표시가 아니다. 그것은 삶과 문학이 만나는 접점이며, 타인의 언어가 자신의 언어로 변화하는 순간의 기록이다.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작가가 나이에 대해 쓴 문장들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작하는 육십이 있고 도전하는 오십이 있고 포기하는 스물이 있으며 안주하는 서른이 있다.

마흔이 되어 느꼈던 정체불명의 허무함과 불안감을 토로하면서도, 결국 나이란 숫자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라는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이 담백하면서도 위로가 된다.



상실과 부재의 의미

특히 인상적인 것은 작가가 '0'에 대해 쓴 철학적 성찰이다.

0은 그냥 0으로서 존재하지만 1-1=0은 상실된 1로서의 0이다.

이별과 상실의 아픔을 수학적 논리로 설명하는 이 문장은 독창적이면서도 깊은 울림을 준다. 원래 0이었던 0과 1이었다 0이 된 0의 차이. 그것이 바로 '혼자'와 '둘이었다가 혼자'가 같지 않은 이유라는 통찰은 실연의 고통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작가는 또한 죽음과 애도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사유한다.

애도라는 것은 단순히 슬픔이 아니라 삶 속에서 계속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스트리아의 한 묘지에서 얻은 이 깨달음은 죽음을 끝이 아닌 다른 형태의 존재로 받아들이는 성숙한 인식을 보여준다.



감각하는 앎과 살아있는 지식

정용준 작가가 강조하는 것 중 하나는 '감각하는 앎'이다.

지식의 앎이 아니라 감각의 앎이 필요하다. 실제로 행동이 멈추고 새로운 행위를 만들어내는 진짜 앎이 필요한 것이다.

이는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몸과 마음으로 체득하는 진정한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작가는 색맹인 사람이 색을 보게 되는 안경을 쓰는 영상을 보며 자신의 일상을 돌아본다.

세계는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 있다. 하지만 그것을 다르게 보고 다르게 느끼는 이에게 세계는 색을 보여주고 그에 걸맞은 감정을 선사한다.

같은 세상을 보면서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문학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소설과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

작가에게 소설은 '인간의 감정과 마음을 잘 알려주는 도구'다. 밀란 쿤데라의 말을 빌려 '인간을 설명할 가장 탁월한 예술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나는 소설이라고 답할 것이다'라고 단언한다. 이는 단순한 문학적 선언이 아니라, 오랜 시간 소설을 읽고 쓰며 체득한 진심 어린 고백이다. 작가는 존 쿳시, 아니 에르노, 알베르 카뮈, 조지 오웰, 프리모 레비 등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나눈다. 각각의 작가들이 어떻게 인간의 조건을 탐구하고 어떻게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지를 보여주면서, 문학이 단순한 오락이 아닌 삶의 필수적인 부분임을 증명한다.



불명료함에 대한 경계와 진정성에 대한 추구

프리모 레비의 영향을 받아 작가는 '불명료함'에 대해 강하게 경계한다.

하지만 모호하다는 것은 다르다. 그것은 아무 이유가 없기에 알 수 없는 어려움이다.

복잡한 것과 모호한 것의 차이를 명확히 구분하면서, 글쓰기에서의 정직함과 명료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는 단순히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것을 정확하게 지시할 단어를 찾는 것이 너무 힘들고 선명한 논리와 문장을 쓰는 것도 어렵기 때문'에 불명료함 뒤에 숨고 싶은 유혹이 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료하게 표현하려는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인간다움에 대한 깊은 성찰

'마음을 보여줄 수 없어 인간은 슬프다'는 문장은 작가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통찰 중의 하나이다. 작가는 인간의 복잡성과 내면의 깊이를 이해하면서도, 그것이 타인에게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 한계를 인정한다.

우리는 각자의 문제에 있어 완전한 타인일 뿐이다. 이해한다고 해도 결국엔 서로에게 무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절망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다운 행위라고 말한다. 소설과 문학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문장 속에서 찾은 삶의 의미

정용준 작가의 『밑줄과 생각』은 단순한 문학 에세이를 넘어선다. 그것은 한 인간이 문학을 통해 삶을 이해하고, 자신과 타인을 받아들이는 과정의 기록이다. 작가가 그어온 수많은 밑줄들이 결국 삶의 밑줄이 되어,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다시 태어날 순 없다. 나 아닌 다른 것이 될 수도 없다. 그러나 다시 할 순 있다.

이 문장은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성숙한 인식을 보여준다.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것. 이 책이 전하는 중요한 메시지다.


책을 덮으며 나는 내가 그어온 밑줄들을 다시 살펴보게 된다. 그 밑줄들이 단순한 표시가 아니라 삶의 흔적이라는 것을, 그것들이 모여 결국 나를 만들어간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정용준 작가의 말처럼, '그 언어와 내 언어가 섞이고 남의 언어를 닮은 새로운 나의 언어가 생기는' 순간들이 바로 독서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이 책은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깊은 공감을, 문학이 낯선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발견을 선사할 것이다. 무엇보다 한 줄의 문장이 어떻게 한 사람의 삶을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책을 읽는 동안 나 역시 수많은 밑줄을 그었다.


그 밑줄들이 언젠가 돌아본 나의 삶에 어떤 의미로 남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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