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긴 세월을 살아낸 비결은
그는 답답할 때면 들로 산으로 다닌다. "뭔 생각을 하면 마음이 이상해져부러. 아무 생각도 안 하고 들로 나가. 나가면 마음이 편항께. 정 답답하면 저그 나가서 소나무하고 이야기를 혀. 소나무야 소나무야 너는 어찌 이리 건강하냐. 나는 마음이 이래이래. 소나무하고 말하고 갈대하고 말하고... 나는 진짜 듣도 안 하고 보도 안 하고 그라고 살았네. 그래야 쓰겠다 싶어서." - 김춘자 님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했냐』는 제목부터 가슴을 울리는 책입니다. 경향신문 젠더기획팀이 수십 명의 6070 여성들을 만나 기록한 인터뷰집인데요. 평생 일했지만 세상이 '일'로 인정하지 않았던 고령 여성들의 삶을 담고 있습니다. 바깥일과 집안일을 오가며 평생을 'N잡러'로 살았던 여성들, 이름보다는 누구의 아내로, 엄마로 불린 여성들에게 명함을 찾아주고자 시작된 여정이 담겨 있습니다.
새벽같이 일어나 밥하고, 애 보고, 장 보고, 일터로 나서고, 또 어쩌다 동네 일까지 도맡아 하지만 직업란에는 늘 ‘무직’이라고 쓰여야 했던 사람들. 국숫집 사장님으로, 탄광 대신 선탄장으로, 아이 셋을 키우면서도 자식들 통장보다 머릿속을 채워주고 싶었던 엄마들입니다. 이는 각자의 삶을 살면서 그 누구보다 성실하게 자기 자리를 지켜온, 우리 주변의 이야기입니다.
김춘자 님도 그렇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꾸밈없이 날것 그대로입니다. 답답할 때면 들로 나가 소나무와 갈대에게 마음을 털어놓아야만, 그렇게 해야만 이 힘겨운 삶을 견딜 수 있다는 이야기. 화려한 이력서도 명함도 없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견뎌온 사람으로서의 진솔한 저 고백 앞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뭔 생각을 하면 마음이 이상해져부러.
생각이 마음을 이상하게 만듭니다. 너무나 놀라운 표현이라 자꾸 쳐다봤습니다. 생각이란 녀석은 정말 못된지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 마음이 무거워지고, 때론 숨이 막혀 세상을 좁게 만들기도 하지요. 특히나 이 시대를 살아낸 우리의 어머니들에게 주어진 생각의 무게는 더욱 묵직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살아온 시간이 뭐였을까' 하다가 그럼 '앞으로는 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해지는 순간들 투성이일 거예요. 집안을 돌봐야 한다는 생각, 아이들을 잘 키워야 한다는 생각, 남편을 뒷바라지해야 한다는 생각, 나이 든 부모를 모셔야 한다는 생각들이 층층이 쌓여, 숨 한 번 들이쉬는 순간에도 겹겹이 밀려옵니다. 이 모든 게 뒤엉킬 때 마음이 이상해집니다. 김춘자 님도 이런 생각들이 마음을 '이상하게' 만든다고 생각하신 것 아닐까요. 병들게 하고, 옥죄고, 본래의 모습에서 멀어지게 한다고. 자책은 다짐이 되고, 다짐은 다시 체념이 되어 갑니다. 그래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로 합니다. 산으로 들로 나가기로 하죠. 이건 도피가 아니라 치유의 방법일 겁니다.
정 답답하면 저그 나가서 소나무하고 이야기를 혀. 소나무야 소나무야 너는 어찌 이리 건강하냐.
소나무와 대화하는 김춘자 님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자연을 친구로 여기고 소나무에게 말을 걸며, 갈대와 이야기를 나눕니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듯이요. '너는 어찌 이리 건강하냐'라고 묻는 그 목소리에서 부러움과 경이로움을 동시에 읽습니다. 소나무의 건강함이 부럽고 그 생명력이 경이로운데, '이래이래' 아픈 내 마음과 대비되는 그 푸르름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정을 실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 대화는 단순한 부러움에서 끝나지 않는 듯합니다. 소나무의 그런 모습을 통해 자신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바람이 담겨 있겠죠. 자연과의 대화를 통해 마음의 결을 만지고 내 삶의 고단함을 고르는 일. 우리가 잊고 사는 능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디 하나 기댈 곳 없는 현실일지라도 자연과 대화하고, 나무와 친구가 되고, 바람과 인사를 나누는 능력. 김춘자 님은 이런 방식으로 자신만의 마음 둘 자리를 가꾸어 오셨나 봅니다.
나는 진짜 듣도 안 하고 보도 안 하고 그라고 살았네. 그래야 쓰겠다 싶어서.
이 마지막 이야기에서 세월이 묻은 지혜를 발견합니다. 듣도 안 하고 보도 안 하고 살았다는 것. 남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남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살았다는 뜻이겠죠. 세상의 잡음을 차단하고 자신만의 길을 걸어왔다는 의미일 겁니다. 무관심이 아니라 간절함이었을지 모릅니다. 살기 위해 외면해야만 했던 시절은, 견디고 또 견디며 살아낸 사람이라면 알겁니다. 김춘자 님의 이 말에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을 품고 살아온 삶의 무게가 들어 있습니다. 무심한 척 살았고 덤덤하게 지나온 듯 보이지만 그 안에 얼마나 많은 고락이 있었는지 우리는 다 알 수 없어요. 그래서 삶이 고되었다는 말보다, 이렇게 살아냈다는 말이 더 깊게 다가옵니다.
긴긴 세월을 살아낸 비결은
거창한 생각이나 삶의 이정표가 아니라
그날그날의 내 마음이 상하기 전에
들로 산으로 나서는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소나무에게 말을 걸고
갈대에게 마음을 덜며
그렇게 오늘 하루를 건너는 일
그런 날들이 쌓여
지금의 당신이 되었고
지금의 나와 우리를 만들었을 겁니다
말없이 세월을 견디며
길을 터고 곁을 내어주신
당신들의 삶에 조용히 감사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