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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원 Oct 20. 2023

살면서 처음으로 혼자 술집에 들어갔다

삶의 의미를 찾아가려 나름의 발버둥을 친다 

 “여기 소주 하나만 주세요.”

      

살면서 수십, 수백 번은 더 들었을 말이 이날만큼은 참 낯설었다. 스물넷이었고 어느 새벽이었다. 나는 북적거리는 술집에 혼자 앉아있었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술을 마신 날이었다.


그전까지는 단 한 번도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처음의 이유는 교회를 다녀서였는데 신입생 때 술에 미숙했던 친구들의 대형 사고들을 하나씩 목격하자 술을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더욱이 싹 사라졌다 우리 과는 유독 뒤풀이가 많았다. 나는 크고 작은 술자리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대신 조금 일찍 자리에서 일어섰고 늦게까지 있게 되면 친구들을 챙기는 역할을 도맡았다. 술 안 마시면 있는 게 재미없지 않냐는 질문도 자주 받았지만, 당시 나름의 지론이 있었다. ‘재밌는 술자리는 술이 없어도 재밌다.’ 즐거운 곳은 정신이 멀쩡한 나도, 잔뜩 취해있는 사람들도 서로 웃느라 분간이 안 될 정도로 한데 어우러졌다. 그 몇 년간 술을 마셔야겠다는 충동도,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술이 없어도 내 인생은 충분히 괜찮았다.     


그럼, 그날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걸까. 우선 출근 준비를 너무 천천히 했다. 아침에 집 밖으로 나왔는데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이대로면 회사에 지각할 것 같아 가까스로 택시를 잡아탔다. 총알 같은 택시는 나를 제시간에 제 장소로 데려다줬다. 입구 앞에 도착한 시간은 안도감이 들고도 남았다. 한층 여유로워진 나는 차에서 내리며 지각을 면하게 해준 택시 기사님께 습관처럼 감사 인사를 건네려다 멈칫하고 말았다. 내가 왜 그에게 감사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꼬리를 물었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따져보면 그는 나에게 노동력을 제공했고 나는 이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돈으로 지불했다. 그의 존재 덕분에 내가 지각하지 않았더라도 그 역시 나의 불상사를 막아주기 위한 목적으로 달리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그의 노동력을 구매해준 사람이었다. 우리 사이에는 그의 행함을 존중하는 일방적인 돈이 오갔기에 이 상황에 대한 정산은 이미 끝난 셈이다. 결국 나는 그에게 감사해야 하는 마땅한 이유를 찾지 못하고 아무 말 없이 택시에서 내렸다. 조용히 출근하는 내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언짢았다.


그 침묵은 당시 내가 일하던 환경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모든 일은 1분 1초까지 쪼개어 주어졌다. 우리는 분배된 시간 내에 쫓기듯 모든 일을 마무리해야 했다. 우리가 제공하는 노동력은 지불되는 대가에 응당 포함된 것으로 여겨졌다. 회사에서 돈을 받았으니 이곳에 있는 동안은 회사가 원하는 대로 사고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전제가 당연하게 요구됐다. 단순한 실수조차 회사에 손해를 끼치는 행위로 여겨져 절대 용납받지 못했다.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회사에서의 사고방식은 점점 내 일상까지 그 영역을 넓혀갔다. 내가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정도도 딱 거기까지였다.   

   

그 아침은 마치 지도 위에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현재 위치를 콕 하고 짚어주는 것 같았다. 네 일상은 네가 그토록 싫어하는 회사에서 원하는 방향대로 변해가고 있다고.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조차 계산하게 된 그 모습이 너의 현주소라고. 자신의 바닥을 마주 보는 건 언제나 힘겹다. 일하는 내내 속이 울렁거렸다. 퇴근하고 나온 어둑해진 밤까지 알 수 없는 멀미가 이어졌다. 같이 일을 마친 동료에게 허공에다 대고 마음껏 악을 쓰며 소리 지르고 싶다고 말했다. 도저히 이대로는 하루를 끝낼 수가 없었다. 답답한 마음을 풀 방도가 필요했다.


보통 스트레스를 받으면 세 가지를 했다. 자거나, 먹거나, 영화를 보거나. 잠은 안 왔고 입맛도 없었다. 얌전히 집에서 눈을 붙이려다 삭혀지지 않는 마음에 뛰쳐나가 영화를 봤다. 그날따라 영화마저 재미가 없었다. 마지막 영화라 다 보고 나오니 새벽 네 시였다. 내 기분은 여전히 침묵으로 차 문을 닫고 나온 아침에 머물렀다. 영화관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는 먹자골목이 있었다. 늦은 시간에도 아직 간판들이 번쩍였다. 나는 홀린 듯 그중 한곳에 들어갔다. 가서 처음으로 남이 먹을 술 말고, 내가 먹을 술을 시켰다. 주문하는 목소리가 살짝 떨렸던 것도 같다. 물이나 사이다를 채우는데 익숙했던 잔에 알코올을 따랐다. 냄새만 맡으면 꼭 아세톤 냄새가 나던 것이 들이키고 보니 별로 쓰지 않더라. 


술을 마시면 기분이 나아지리라 기대했던 건 아니다. 그저 뭐라도 해야 했다. 무언가 행동을 통해 기분이 좋아지기보다는 그걸 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마음이 채워질 때가 있다. 내겐 술 마시는 게 그런 행위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탈이자 몇 년을 지켜온, 나를 규정하는 가장 큰 신념이자 규범을 깰 정도는 되어야 이 감정이 잦아들 것 같았다. 그날 그렇게 한 병을 다 마시고 집에 들어갔다. 여지없이 다음 날도 출근을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술을 마시게 됐다고 말했다. 가족과 연인은 싫어했고 친구들은 놀란 반응이었다. 나는 그런 걸 원한 게 아니었는데. 그냥 “많이 힘들었구나...”하고 말해주길 바랐다. 어디 가서 술 달라는 말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사람이 새벽에 혼자 술집에 들어가서 술을 주문하고 마시기까지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을지, 얼마나 지난한 감정을 겪었을지, 단지 그걸 이해해주길 바랐다. 그때는 내게 그런 말을 건네주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그곳에서 6개월을 더 일했다. 이후로도 끊임없이 술을 들이켰다. 

     

그 다음에 들어갔던 회사는 당시 내 기준에서는 아주 이상한 곳이었다. 첫 출근 날, 주어진 일에 열심히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지나가던 부장님이 나를 보고는 말씀하셨다.  

    

“뭘 그렇게 가열차게 해. 좀 천천히 해.”  

   

내 귀를 의심했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무조건 더 효율적으로 빠르게 많은 일을 처리해야 하는 그전과 다르게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 일의 양도 빡빡하지만은 않았고 훨씬 자율적으로 주어진 업무가 많았다. 본인의 할 일을 다 하면 누릴 수 있는 잠시의 쉼도 존재했다. 가끔은 다 같이 회의실에서 떡볶이를 먹으며 담소를 나눴고 회사 복지 프로그램으로 다 함께 아이맥스 영화를 보거나 공방에 가서 도자기를 만들기도 했다. 나는 근무 시간에 이래도 되냐는 질문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이곳 사람들의 표정은 다 밝았다. 한 명도 빠짐없이 쾌활한 성격에 여유로운 일상을 지닌 자들에게서 나오는 자존감이 묻어 있었다. ‘좋은 사람들’이라는 말이 꼭 어울리는 곳이었다. 눈이 독기로 가득했던 전 상사들이 생각났다. 그들과는 너무 다른 아우라에 생각이 많아졌다. 이 사람들이 좋은 건 그냥 태생부터 그런 사람들이어서일까, 아니면 이 환경이 이들이 이렇게 좋은 사람일 수 있도록 만들어준 걸까. 전 상사들도 이런 환경에서 일했다면 그 눈에 독기를 안 채워도 괜찮지 않았을까 하고. 그럼 그들도 조금의 느슨함을 갖춘 사람이지 않았을까. 이곳에서 일하면서도 자주 술을 마셨다. 그전과는 다른 결의 표정과 들이킴이었다. 나는 웃고 있다가도 종종 그때를 떠올렸다.

      

개인은 절대적으로 자신이 속한 곳의 영향을 받는다. 나를 둘러싼 영역 내 보고 듣는 모든 것들이 내 삶에까지 오지 않도록 차단할 능력이 나에겐 없다. 특유의 발랄함을 뿜어내는 이에게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티가 난다고 말하는 것처럼, 누군가 밝을 수 있는 이유도, 어두운 표정을 짓는 이유도, 친구의 아픔을 살필 여력이 없는 이유도 그를 구성해온 환경의 영향이 있을 거라 짐작하게 됐다.


살면서 좋은 상황보다는 그렇지 못한 때에 처한 경우가 더 많다. 우리는 환경을 택하고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동시에 모든 게 마음처럼 돌아가 주지는 못하니까. 그렇다고 힘든 시간에 놓였던 걸 나쁘게 여기지만은 않는다. 그 속에서도 나름의 얻을 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나는 그 시간 덕분에 괴로움을 견디는 친구 앞에서 한 잔을 같이 기울여줄 수 있게 되었다. 회사 때문에 힘들다고 말하는 친구의 고민을 진심으로 듣고 함께 울어줄 수 있었다. 덕분에 이해할 수 있는 타인의 아픔이 늘어났다. 우리는 그렇게 모든 시간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 같다. 이렇게 가다 보면 조금은 더 나아지지 않을까 바라면서. 삶 안에는 그런 모든 종류의 발버둥이 들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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