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은 과거 내 열망의 산물이 아닐까
가끔 밤에 뜬금없이 친구에게 전화를 걸고는 한다. 생각이 나서 연락했다고. 어른이 되고 나서는 연애, 취직, 퇴사, 가족의 소식 등 어떤 상태의 변화나 문제가 생겨도 누구한테까지 이를 전해야 할지 몰라 말을 아끼게 된다. 문득 거는 전화는 이를 전해 듣기에 매우 좋은 타이밍이다. 고요함이 익숙해지는 시간, 친구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듣고 동시에 나의 근황도 전한다. 자주 통화를 하다 보면 불과 몇 달 사이에도 우리가 나누는 생각들이 그 전과는 확연히 달라져서 깜짝 놀랄 때도 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밤이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 달 전쯤에도 그와 통화를 했었는데, 그날따라 그에게 전화해야겠다 싶었다. 휴대폰을 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통화 연결음이 사라졌다. 잘 지내고 있냐는 안부 인사로 시작한 그의 목소리는 이내 내게 새로운 소식을 알렸다. 다음 달에 그가 미국에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대구가 본가인 그는 독립생활 짬밥이 오래된 서울권 자취생이었다. 대학교에서 복수전공으로 프랑스어문학과 경영학을 공부하고 몇 번의 인턴을 거쳐 부동산 관련 회사에 일자리를 구했다. 학생 때 가끔 신촌에 갈 일이 생겨 그에게 얼굴이나 보자 하고 연락하면, 그는 대부분 동기들과 함께 도서관에 있었다. 친구를 만나는 것도, 외부 활동도, 공부도, 여행도 그 어느 것도 게을리하지 않는 보기 드물게 성실한 친구였다. 이런 그가 신입사원으로 취직한 지 1년 남짓 되었을 때였다.
그는 한인들이 만든 미국 LA에 있는 한 스타트업에 채용이 됐다고 했다. 3개월 인턴직이었고 그 이후는 어떻게 될지 몰랐다. 취업 준비 시기에도 한 번도 해외에서 일하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없는 그였다.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예고 없던 당장의 미국행에 ‘갑자기?’라는 말을 하려다 입을 닫았다.
과연 갑작스러운 결정이었을까. 그가 합격을 한 건 미국에서 일할 수 있는 구인·구직 사이트를 열어봤기 때문이었겠지. 고된 퇴근을 마치고 집에 와서 그가 얼마나 눈을 반짝이며 그 공고들을 찾아봤을까. 얼마나 많은 시간을 그 앞에 앉아있었을까. 내가 섣불리 갑작스럽다는 말을 꺼내는 건 그의 진심이 담긴 시간을 부정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저 축하한다고, 잘 다녀오라고 응원만을 전했다.
전화를 끊고서 그와의 기억을 돌이켜 봤다. 그 친구를 처음 만난 건 몇 해 전 페루에서였다. 같이 다니던 동행이 겹쳤던 우리는 다 같이 페루의 어느 바에서 칵테일을 마셨다. 학기 중 겨울방학에 남미 여행을 왔던 그는 사실 한 학기 동안 케냐로 해외 봉사를 계획했다고 했다. 서류부터 면접까지 긴 전형 과정을 거쳐 최종 멤버로 뽑혔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가지 못했다. 남미 여행은 그 대신 온 것이었다. 케냐 얘기를 하는 그의 눈빛이 조금은 슬퍼 보였다. 우리가 서울에서 만났을 때도 비슷했다. 한국에서 그를 처음 본 날, 그는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해외 인턴 프로그램을 신청해놓은 상태였다. 공교롭게도 우리가 카페에 있던 때가 합격 발표 시간이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지원만 했다고 말했던 그였지만, 앞에서 손을 떨고 마음을 졸이며 결과 조회를 눌렀다. 불합격 글자를 보고는 도서관으로 돌아가 공부해야겠다며 농담하던 기억이 난다.
미국행은 처음이었지만 결코 처음이 아니었다. 그에게 이 얘기를 했는데 그는 당시 이 프로그램에 지원했었던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의 머리에서는 잊혔더라도 마음에는 남아있었을 것이다. 그는 매번 다른 방식으로 계속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그가 이번에는 미국으로 눈을 돌리게 된 이유였다. 갑작스러운 선택이었다기보다 오랜 시간 그의 깊은 마음속에 자리하던 어느 열망의 발현이었다.
내게도 같은 경험이 있다. 중남미를 여행했던 기간이 5개월 정도 된다. 한 해 동안 두 번을 다녀왔다. 처음 그 대륙에 발을 디뎠을 땐 혹여나 누가 소매치기를 할까 봐 작은 가방을 내내 가슴에 소중히 끌어안고 걸었다. 하지만 점차 익숙해진 뒤에는 원피스에 에코백을 메고 다녔다. 이질적인 공간에 살아 숨 쉬고 있는 내 모습이 자연스러워지면 그 전을 잊게 된다. 남미라는 대륙이 미지의 땅에 불과했던 나를, 그곳을 다녀온 이를 동경해 마지않았던 나를.
가끔 SNS에서 몇 년 전 게시물을 확인하라는 알람이 뜨면, 낯선 피드가 나를 반겼다. 내 피드에는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남미 여행 사진과 영상, 글이 빼곡하게 공유되어 있었다. 내 기억 속에는 전혀 없는 내용이었다. 오히려 이제 나는 그런 게시물을 쓰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조그마한 액정과 현실의 거리가 아득해 하나도 와닿지 않았을 그 내용을 마음에 차곡히 쌓으며 그렇게 여기까지 다가왔던 것이었다. 언젠가는 가겠다고 마음에 담으며 겁이 나도 용기를 얻으며. 기억조차 나지 않는 글을 열렬히 읽던 나의 눈이, 그 글을 소중히 공유하던 나의 손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으리라.
마음 한켠에 간직한 열망이 있다면 필연적으로 꿈꾸는 것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믿는다. 나도 모르게 귀가 그곳으로 향하고 걸음의 방향이 바뀌어 내내 그 주위를 맴돌고 있을 테니까. 그저 다른 요소로 인해 마음을 놓지만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분명 어느 순간에는 내가 오랫동안 지켜온 바람이 내가 꿈꾸던 그 자리에 나를 데려다 놓아 줄 날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