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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원 Oct 20. 2023

더 잘 살고 싶다는 말에 담긴 의미

모두가 원한다는 사실이 내가 원한다는 걸 뜻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을 만나 나누는 이야기들이 크게 다르지 않다. 끝맺을 때도 그렇다. 어떤 소재로 이야기하든 습관적으로 귀결되는 결론이 있다.     


“잘 살아야지, 

더 잘 살아야지.” 

     

이건 자조일까, 바램일까. 도대체 나에게 하는 건지, 너에게 하는 건지, 누군가 듣고 이뤄주길 바라는 건지 목적을 알 수 없지만, 이 부적 같은 말을 놓을 수가 없다. 곧 허공에 흩날릴 소리라도 마음에 담아만 두기보다 증인들 앞에 잠시라도 붙잡아 고한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사는데 앞으로 더 잘 살아야지만 의미가 있지 않겠니.’, ‘내가 잘살 수 있는 사람이 맞겠지. 그래야지. 그래야 뭐라도 붙잡고 살아갈 수 있지.’ 그런 속뜻을 품고서. 


그러다 문득 의문이 생긴다. 잘 산다는 건 무엇일까. 오늘보다 내일 더 예뻐지면, 좋은 사람이 곁에 많아지면, 돈을 더 많이 벌면, 더 잘 산 내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기준은 모두가 다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앞서 말한 부분이 충족되었다고 해서 더 나은 삶이라 말하지는 못할 것 같다.  

    

회사에 다니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돈을 버는지 찾아봤던 시기가 있다. 한 번 검색하고서부터 내 모든 인터넷 창과 SNS는 관련 광고로 도배가 됐다. ‘월 천만 원’, ‘하루 4시간만 일해요’, ‘경제적 자유 달성’ 등 눈 돌아가는 문구로 가득하다. 부동산, 스마트 스토어, 블로그,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등... 시중에 나온 모든 수단을 한 번씩 눌러봤다. 이걸로 성공한 사람이 누가 있는지, 그가 어떤 강의를 냈는지, 내게는 무엇이 맞을지 고민하다 결제 직전까지 갔다. 


정신을 차린 건, 이를 목표로 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을 인지하고 나서다. ‘내가 그걸 진정으로 원하는가.’ 내가 바라던 게 과연 월 천만 원을 버는 삶이었나. 4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는 삶이었나. 더는 돈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삶이었나. 내가 그런 모습을 갈망해야만 기회비용을 감수하고 그 방향을 향해 열심히 달려갈 테니. 


하지만 내가 회사에 묶이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더 많은 돈을 벌고자 함이 아니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을 보다 가치 있게 사용하고 싶었다. 회사에 속하면 일하는 것 외에 부가적인 스트레스와 불필요하게 소모되는 시간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시간적, 공간적 제약과 상사의 기분에 맞춰 변동되는 일 처리, 왜 해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는 일에 ‘위에서 시켜서’라는 이유가 전부가 되는 것도. 그곳에 나의 에너지를 쏟는 게 아까웠다. 나의 모든 시간이 의미를 품고 뚜렷한 목적 아래 움직이길 원했다. 힘들어도 괜찮으니 나의 노력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방향에 쓰였으면 했다.


더 적은 시간 일하고 더 많은 돈을 벌면서 충분한 여가를 누리는 건 내가 꿈꾸는 하루와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 그럼 나는 왜 그렇게 열심히 그 화면들을 들여다봤던 걸까. 다른 수많은 이가 그걸 바란다고 외쳐서였다. 결코 내 것은 아니었는데도.      


지나간 시간에서 ‘이때는 잘 살았지’하고 말할 수 있는 때를 떠올려봤다. 치킨집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던 새벽, 마지막 손님이 나가기를 기다리며 영수증 종이 뒤편에 꾸역꾸역 일기를 쓰던 순간. 불안함을 딛고 용기 내어본 일이 성취감으로 돌아와 잔잔한 안도의 미소가 감돌던 날. 어딘가 고장 난 나를 고치기 위해 매일같이 눈물 흘리고 그만큼 많이 웃으려 노력하던 시절. 감히 빛났다고 여겨진다. 과거 얼마나 잘 살았는지는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과 짓고 있던 표정, 최선을 다해 애쓰던 나의 태도에 따라 나열된다. 아마 누구도 자신이 벌었던 돈의 액수대로 잘 살았던 시기의 순위를 매기지는 않을 것이다. 


사뭇 모순적인 풍경이다. 지금 ‘잘 살아야지’를 되뇌는 내 머릿속에는 훗날의 내가 명확히 더 나은 환경에 둘러싸여 있기를 원한다. 미래를 보장해주는 더 좋은 회사에 있기를. 혹은 인생을 바꿔줄 좋은 기회를 잡았기를. 그러나 흘러간 과거가 말해준다. 가장 중요한 건 그 안의 네 모습이라고.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기억이 달라질 거라고. 마치 나중에는 지금을 그 어느 때보다 잘 살았던 시기로 회상할 수도 있다고 속삭이듯이. 

     

처음으로 외부 상황을 배제하고 오롯이 내가 미래에 어떤 사람으로 크고 싶은지를 그려봤다. 성숙한 어른이었으며 좋겠다는 추상적인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나는 목표를 향해 임계점을 넘어 인내하고 노력해본 경험을 갖춘 사람이고 싶고, 두루 지식을 쌓아 주어진 상황에 올바른 판단을 제시하는 현명함을 지니고 싶다. 또한 꾸준히 성장하며 주변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이런 사람이라면 어떤 여건에 처해있든 분명 빛나는 모습일 것이다. 


앞으로는 더 좋은 회사, 더 좋은 기회를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내가 되는 데에 기준을 잡고 살아가려 한다. 그 모습에 닿아가는 게 ‘잘 사는’ 현재와 미래를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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