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는 가지고 있지 못했던, 현재의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
초등학생 때 학기가 끝나면 성적표를 받았다. 첫 장에는 과목별로 수우미양가에 동그라미 표시가 되어 있다. 나는 이를 본 체만 체하고 종이를 뒤집었다. 내가 보고 싶었던 건 맨 뒷장이었다. 나의 한 학기에 대한 담임 선생님의 평가가 적혀 있는 '담임의 한마디.' 어린 나이에도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하기는 매한가지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6년 내내, 고작 두 문장으로 채워진 빈칸에는 이 말이 빠지지 않았다. '교우 관계가 좋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왕따인 줄도 몰랐다. 담임과의 상담을 다녀온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어렴풋이 '아, 내가 왕따구나.'하고 깨달았던 기억이 있다. 학교가 세상의 전부이던 시절, 나는 날마다 다음 날 학교에서 누구랑 놀아야 할지 걱정과 고민을 하다 지쳐 잠들었다.
새로운 중학교에 배정받은 14살은 설렘과 추락의 정점을 찍은 해였다. 분명 학기 초엔 친해진 친구가 있었다. 판타지 소설을 좋아하는 공통점을 가진 친구였다. 우리는 쉬는 시간에 서로가 가져온 책을 읽었고, 엄마는 그 친구와 방과 후에 떡볶이를 사 먹으라며 돈을 쥐여줬다. 하지만 어느 새부터 그 친구는 나와 말을 섞지 않았다. 새 학기인 3월이 끝나갈 무렵, 반에서 나를 지칭하는 새로운 이름이 생겼다. '부담녀.' 부담스럽게 생겼다는 이유에서였다. 학급의 모든 애들이 나를 피했다. 어디에도 끼워주지 않고 대놓고 놀리기를 반복했다.
후에 새로 온 전학생이 나에 관해 묻자, 반 애들은 "쟤 착한데... 그냥 좀 그래"라고 답했다고 한다. 나는 항상 학교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방에 앉아서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맞은편 아파트의 옥상을 하염없이 쳐다봤다. 그리고 나를 괴롭히던 아이들에게 어떤 형태의 죽음이 가장 강력한 인상을 남길 수 있을지를 상상했다.
'내가 이대로 떨어지면 걔네는 지금은 힘들어하겠지만 곧 나를 잊어버릴 거야. 그러면 안 되는데.. 아, 그럼 지금 휴대폰으로 예약 문자를 걸어놓자. 유서에 휴대폰을 정지시키지 말아 달라고 적어놓고, 해마다 내가 죽은 날짜로 50년 치 문자를 예약해놓는 거야. 그럼 그 친구들이 대학에 갔을 때도, 결혼했을 때도, 애를 낳았을 때도, 적어도 일 년에 하루는 자신이 한 짓을 기억하고 죄책감에 살아가겠지?'
종이와 펜을 꺼내 들었지만 차마 실행으로까지 옮기지는 못했다. 학원과 교회에는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이들이 몇 있었다. 혹여나 그들에게까지 내가 왕따라는 사실을 들킬까 봐 내내 마음을 졸이며 전전긍긍했다. 고등학생 때는 교내에서 실시한 심리검사 결과가 나오자 상담실로 불려 갔다. 결과가 너무 안 좋게 나와서였다. 불안감 백분위 98, 자아 강도 백분위 2. 그 누구보다 불안해하고 자신에 대해 아무런 확신을 갖지 못한 사람이 나였다. 언제 어떻게 와르르 무너져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삶이었다.
10대 때와 20대 때의 모습이 확연히 다르다. 내가 무엇이 변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성인이 되고서부터는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다. 그래프로 비유하면 10대 때는 내내 마이너스 면에 머물렀다. 반면 20대의 그래프는 휘몰아쳐도 플러스 안이다.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그게 바닥을 뚫고 마이너스까지 내려가지는 않는다. 과거의 인간관계는 나를 죽고 살게 했지만, 적어도 이제는 든든한 내 편이 있으니까. 나를 응원해주고 함께 고민을 나눠주는 이들의 존재가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나누는 기준 축을 두껍게 만들어줬다. 어떤 문제도 나를 벼랑 끝으로 밀지는 않았다.
가끔 친구들에게 깊이 묻어둔 과거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지금은 꽤나 단단해 보이는 축에 속하는 사람이 됐다. 그러나 나만큼은 안다.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는 걸. 단단하다는 말을 듣기까지 내가 어떤 울음과 고통과 생사를 넘나드는 시련의 시간을 거쳐 왔는지를. 지금이 결코 저절로 만들어진 현재가 아니라는 것을.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도 느낀다. 나이를 먹으며 오랜 지인들을 알아 온 햇수도 점점 늘어난다. 가장 많이 흔들렸던 시절을 봐온 친구들은 벌써 태가 달라졌다. 대학 동기인 한 친구는 스물한 살 때 갑자기 짐을 싸서 집에서 나왔다. 묵혀뒀던 가족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와 터졌다. 더는 집에서 못 살겠다며 독립 전까지 친구 집에 며칠을 얹혀 엉엉 울었다. 공채에 붙은 회사에서는 난데없이 팀이 해고 대상에 올라 심리 상담센터를 다녔다. 그때 그랬었다. 적성이고 나발이고 안 잘리는 게 이렇게 중요한 일인지 몰랐다고. 자취방에서 아무리 소리를 지르며 울어도 아무도 자신을 찾아와주지 않더라고.
지금 그녀는 그녀를 너무나 사랑해주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앞뒀다. 새로운 직장에서도 예쁨을 듬뿍 받고 있다. 몇 년 전부터는 가족과의 관계도 회복되어 잦은 왕래를 한다. 그녀가 기댈 수 있는 단단한 기둥이 되었다. 얼마 전 그녀를 만나 요즘 고민을 물었는데, 같이 입사한 동기가 근래 사람들의 미움을 받는다는 말을 꺼냈다. 본인이 자초한 일이지만 안타까워 신경이 쓰인다고. 타인을 향해있는 그녀의 고민이 그녀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대변해주는 듯했다. 우리를 두르고 있던 고민은 본디 더 거대하고 무서웠으니까. 다른 사람의 눈빛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그녀가 그간의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이겨낸 보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늘 더 잘 살아가기 위한 고민을 이어 가지만 그 무게가 예전보다는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아 안심이 됐다.
나의 고민도 더 사소해졌다. 언젠가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할 수 있을까 걱정하고, 미래에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아 한숨도 쉬지만, 살을 빼야 하는데 과자를 먹고 싶은 마음에 머릿속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글을 써야 하는데 집중력을 유지하기가 어려워 울상을 짓는다. 온전히 나의 성장을 향하고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즐거운 고민이다. 지금 내가 괜찮을 수 있는 이유는 지난 시간을 거쳐왔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통해 의지할 수 있는 튼튼한 기반이 길러져서다. 자신만의 토대를 갖춘 사람의 대다수는 원래부터 그것을 갖고 있지는 않았더라.
진솔하고도 사소한 일상의 고민을 이어가고 있는 모든 이들을 안아주고 싶다. 고생했다는 말을 건네며 잔뜩 토닥여주고 싶다. 여기까지 살아내느라, 이곳까지 도달하느라 애썼다고. 삶은 단 한 순간도 쉽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나,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걸 자신의 것으로 만든 사람들이 앞으로는 부디 따뜻함 위에서만 견디는 삶이었으면 하고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