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번지점프대 위에 올라가 있는 듯한 기분
마음 맞는 친구와 가평으로 번지점프를 하러 갔다. “해보자!”며 기차를 예약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바닥이 한참 밑으로 보이는 점프대 위였다. 함께 간 친구가 먼저 점프를 시도했다. 일말의 망설임 없이 한 번에 뛰어내렸다. 그녀가 없어진 빈자리에는 다음 순서인 내가 올랐다. 친구의 모습을 보고 용기를 얻어 당당하게 섰으나... 막상 아무것도 없는 공중에 발을 뻗으려니 움직이지 않았다. 이건 말이 안 됐다. 허공에 몸을 내던지는 건 뛰어내리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부터 불가능한 행위였다. 당황스러움에 식은땀이 나려던 찰나, 뒤에서 로봇 같은 무미건조한 음성이 들렸다.
“자, 뛸게요. 하나, 둘, 셋, 번지-”
나는 어색한 듯 웃으며 조심히 뒤돌아봤다. 선글라스를 낀 직원이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저... 진짜 죄송한데, 못 뛰어내리겠어요...
이거 어떻게 뛰어요?”
이 순간이 일상인 그에게 분명 나 같은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으리라. 그는 익숙한 듯 아무런 톤의 변화 없이 다음 대사를 했다.
“그냥 뛰어내리면 됩니다.
이번에도 못 하면 그냥 내려가셔야 해요. 하나, 둘, 셋, 번지”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조언에 나는 우는 표정으로 다시 정면을 봤다. 지금 주어진 방향은 허공인 앞, 직원이 버티고 있는 뒤, 딱 두 개뿐이다. 그중에서 나는 핑계 없는 직원의 냉정한 표정을 마주할 자신이 더 없었던 것 같다. 빈 곳으로 점차 나의 몸을 기울였다. 울며 겨자 먹기로 뛰어내렸다.
먼저 밑에 내려간 친구가 찍어준 영상을 보면 나는 뛰어내리자마자 오디오가 일 초도 비지 않게 소리를 꽥꽥 질렀다. 강물 가까이 내려갔다가 반동으로 튀어 오르고 떨어지고를 몇 번 더 반복한 뒤 밑에서 나를 기다리던 배에 간신히 올라탔다. 땅을 딛고 나서도 다리가 그 느낌을 기억하는지 30분 정도 후들후들 떨렸다. 그날 내내 친구에게 단언했다. 너무 무서웠고 내 인생에 두 번 다시 번지점프는 없다.
그런데 요즘 그때 번지점프를 하며 느꼈던 감정이 새록새록 생각난다. 나 대신 삶이 번지점프대에 올라 있는 기분이다. 이미 뛰어내린 상태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하려나. 다른 길을 택하겠다고, 할 수 있다고 호기롭게 올라갔으나 정작 뛰어내린 동력은 긍정적인 의지보다는 떠밀림에 가까웠다. 달리 다른 선택지가 없었으니까. 이걸 하겠다고 여기까지 온 모든 교통비와 티켓값을 이제 와서 무를 수는 없었으니까.
번지점프가 다른 놀이기구보다 더 무서운 이유는 안전바가 없기 때문이다. 의지할만한 물체라도 잡고 있어야 마음이 안심될 텐데 지탱해주는 게 아무것도 없다. 잡을 게 없으니 떨어지는 속도와 공포감 앞에서 할 수 있는 건 눈을 딱 감고 이 하강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언젠가 끝이 날 이 변동을 버티는 것. 그게 이미 뛰어내린 내 선택에 대한 책임이었다.
수많은 순간이 스쳐 지나간다. 신경 쓰지 않는다고 여겼던 누군가의 합격 소식을 듣고 괜스레 마음 한구석에 불안함이 피어올라도, 잘될 거라는 확신이 없어서 그 마음을 적고 우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일 때도, 이런 나를 사랑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아 마음이 텅 비어버려도. 해야 하는 건 그저 눈 꼭 감고 버티는 것.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잊고 있던 내 등 뒤의 줄이 떠오르지 않을까. 비록 느끼지는 못해도 무언가 나를 붙잡고 있었다는 걸 깨달을 날이 오지 않을까.
이 모든 과정이 과거가 되는 훗날, 덜덜 떨리는 다리를 두고 이야기하겠지. 아, 그때 힘들었다. 다시는 못 한다. 그러나 분명 점프대에 오른 결정과 뛰어내린 행위는 후회 없는 뿌듯함으로 기억될 거다. 다시 정신을 차려보면 내가 다른 점프대 위에 서 있을 수도 있다. 실소가 나도 또 뛰어내리겠지. 차마 뒤로 갈 수는 없어서. 모든 건 그런 식으로 흘러왔으니까.
사실 다른 건 잘 모르겠고 빨리 지금의 번지점프가 끝났으면 좋겠다. 나는 아직도 눈 뜨고 풍경을 볼 여유 없이 소리를 내지르고 있다. 아마 매 순간 마음을 졸이며 살아갈 것 같다. 평생 스릴을 즐기는 대담한 용자는 못 되겠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점프대 위에 발을 올려놓을 것이다. 겁 없이 “해보자!”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