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이 아닌 사람으로 보는 시선
엘리베이터에서 자주 마주치는 이웃을 보며 생각한다.
언제나 밝은 미소로 먼저 인사하고, 오늘 날씨 이야기를 건네는 그 사람.
나는 어색한 미소만 지으며 하얗게 빛나는 층수 표시만을 멍하니 바라본다.
1초가 1분처럼 느껴지는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스쳐갈 수 있는 인연을 붙잡아 단단한 관계로 만들어간다.
회사를 그만둔 후에도 전 동료들과 주기적으로 모임을 갖는 친구가 있다.
나는 퇴사할 때 조용히 짐을 쌌다. 인수인계만 끝냈고, 작별 인사도 간단히 마쳤다.
공적 관계의 끝이 곧 모든 관계의 끝이라고 생각했다.
취미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과 진짜 친구가 된 사람도 있다.
처음에는 같은 관심사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서로의 고민을 나누고 생일을 챙긴다.
모임이 끝나도 남아서 수다를 떨고, 개인적으로 만나 밥을 먹는다.
나는 모임이 끝나면 바로 집으로 향한다.
"다음에 또 봐요." 그저 스쳐 가는 인사를 남긴 채.
단골 카페 사장님과 친구가 된 이야기도 들었다.
매일 아침 같은 자리에서 커피를 마시던 손님.
어느 순간 사장님은 손님의 취향을 기억해 주더니,
어느 날부터인가 둘은 서로의 고민을 나누기 시작한다.
가게 운영의 어려움도, 개인적인 이야기도 주고받는 사이로.
하지만 나는 여전히 손님일 뿐이다.
무엇이 다른 걸까.
같은 공간에 있고, 같은 순간을 보내는데.
어떤 사람은 그 순간을 관계의 시작으로 만들고, 어떤 사람은 그냥 지나쳐 버린다.
공적 관계를 사적 관계로 발전시키는 건,
특별한 기술이 아니라 마음가짐의 차이인 것 같다.
상대방을 '역할'이 아닌 '사람'으로 보는 시선.
카페 사장님이 아닌 누군가의 가족으로,
같은 취미를 가진 동호인이 아닌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개인으로.
그런 시선을 가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묻는다.
"요즘 어떠세요?" "힘든 일은 없으세요?"
나는 왜 그렇게 하지 못할까.
거절당할까 봐, 이상하게 볼까 봐 두렵다.
공적 관계의 경계를 넘는 순간 마주할 변화가 걱정된다.
하지만 그 두려움 때문에 많은 것을 잃지는 않았을까.
진짜 관계가 될 수 있었던 수많은 기회들을.
서로를 더 깊이 알아갈 수 있었던 무수한 가능성들을.
어제 엘리베이터에서 그 이웃을 다시 만났다.
"더위가 좀 풀렸네요. 어디 다녀오시나 봐요?"
나의 작은 물음에, 따뜻한 대화가 시작됐다.
이렇게 조금씩 공적인 관계의 틀을 조심스럽게 넓혀가는 것.
그게 스쳐 가는 인연을 붙잡는 첫 번째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변해있지 않을까.
굳어있던 관계도, 타인에 대한 시선도, 그리고 움츠러들었던 나 자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