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관계에 대하여
오래된 돌담 위로 오후의 햇살이 길게 늘어지던 날이었다.
가벼운 스마트폰 대신, 묵직한 카메라를 목에 걸고 덕수궁으로 향했다.
렌즈를 통해 세상을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담아보고 싶어서.
그런데 막상 도착하고 나니 망설여졌다.
아름다운 풍경을 앞에 두고도 선뜻 셔터를 누르지 못했다.
왠지 모르게 조심스러웠고, 자꾸만 주변 눈치를 보게 되었다.
'이런 곳에서 이렇게 큰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도 되나?'
'누군가에게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면 어떡하지?'
스스로 만든 투명한 벽에 갇혀 한참을 머뭇거리다,
문득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쪽에서는 전문가용 카메라로 고궁의 처마를 진지하게 담는 분이 있었고,
어떤 커플은 얼굴을 맞대고 셀카를 찍으며 웃고 있었다.
할아버지 한 분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뛰어노는 손자의 모습을 연신 카메라에 담고 계셨다.
아.
여기서는, 사진을 찍어도 되는구나.
그 순간 모든 게 달라졌다.
같은 공간, 같은 나였는데, 그제야 자연스럽게 카메라를 들어 올릴 수 있었다.
단지 '여기서는 그래도 괜찮다'는 작은 생각 하나가 바뀌었을 뿐인데.
집으로 돌아와 사진을 정리하며, 문득 덕수궁에서의 그 안도감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연스레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함께 있으면 유독 편안해지는 사람들.
그들 앞에서는 신기하게 평소보다 말이 많아진다.
짓궂은 농담도 스스럼없이 나오고, 가끔은 마음속 깊은 이야기까지 털어놓게 된다.
마치 '여기서는 편하게 이야기해도 돼'라는 보이지 않는 신호를 보내주는 것처럼.
반면, 나를 투명한 벽 앞에 세우는 사람들도 있다.
딱히 나에게 못되게 군 것도 아닌데, 그 앞에만 서면 머릿속에서 모든 단어를 검열하게 된다.
'이 말이 너무 가벼워 보이지 않을까?'
'혹시 나를 판단하고 있는 건 아닐까?'
보이지 않는 벽이, 나를 자꾸만 작아지게 만든다.
무엇이 다른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를 편하게 만들어주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보였다.
그들은 자신의 실수담이나 부족한 모습을 먼저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마치 덕수궁에서 먼저 사진을 찍고 있던 사람들처럼.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고, 판단하지 않고 공감해 주었다.
자신의 약한 모습을 슬쩍 보여주는 용기.
그것만으로도 상대방은 자연스레 마음을 열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먼저 다가가는 건 쉽지 않다.
괜한 오해를 살까 봐 조심스러운 마음이 앞선다.
그래서 아주 작은 것부터 연습해보려 한다.
먼저 안부를 묻는 것.
상대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는 것.
내 생각과 경험을 조금씩 솔직하게 나눠보는 것.
완벽해 보이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는 것.
결국 좋은 관계란, 특별한 기술이 아니었다.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마음의 공간을 내어주는 일.
덕수궁이 나에게 편하게 사진을 찍을 장소를 내어주었던 것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따뜻하고 안전한 공간을 만들어주는 사람.
그 사람이 내 앞에서만큼은 가장 자기다워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