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리롱 Apr 29. 2021

소고기의 위로

그녀가 괴로움을 덜어준 방식

그날도 역시 두 줄을 보았다.


임신 테스트기 말이다. 아기가 생기면 소변 내 hCG 호르몬이 생긴다. 초기에는 호르몬의 농도가 낮아 가장 호르몬이 농축된 아침 첫 소변으로 테스트를 해볼 수 있다. 적신 테스터를 편평하게 두고 3분 후 결과를 판독하는 일. 일반적인 임신 첫 확인 과정이다.


퇴근 후 아침까지 참지 못하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가 또 확인해봤다. 선명하게 두줄이었다. 그리고 전날 것과 비교해봤다. 전날 것보다 흐리다.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번에도 아닐 거라는 걸.


"내가 이래서 테스터 안 믿는 다니까. "


조용히 혼잣말로 읊조릴 뿐. 이미 여러 번 겪은 일이라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래도 한편 유산은 아닐 거라고 믿었다. 수많은 테스터 브랜드가 있고 이번엔 다른 걸 사용했으니 다를 수가 있지 하고 다음 날 아침을 기약했다.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역시 아니었다. 아침에 회사 가야 하는데 출근길부터 눈물이 난다. 이별. 여러 번 겪어도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 일 덤덤하게 보내기 힘든 일이다. 그렇게 버스 제일 뒤에 앉아 숨을 죽이고 울었다. 이런 날은 유독 회사 가는 길이 짧다. 정신을 차리고 회사 1층 화장실에서 단정히 마음을 가다듬고 아무 일 없던 양 출근을 했다.


아무리 상념을 떨치려 해도 집중이 되지 않는 날이었다. 남편은 역시 퇴근 늦을 것이고, 익숙하게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긴 설명 없이 이번에도 아닌가 보다고 간단히 소식을 알렸다.


"퇴근하고 곧장 삼성역으로 와. 맛있는 거 사줄게. "





보통 우리는 간단하게 가벼운 식사를 하고, 예쁜 카페에 가서 한참 수다를 떤다. 익숙하지 않은 도시를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서울 메이트. 회사에 이런저런 일, 결혼 생활의 이런 에피소드 얘기하다 보면 시간이 훌쩍 가지만 우리의 신랑들은 아주 퇴근이 늦는 편이라 종종 이렇게 만나곤 했다.


그날 친구는 별 다른 말 없이 고기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특별한 날도 아닌데 무슨 고기씩이나 사주냐며 한사코 거절했지만 그녀의 고집은 아무도 말릴 수 없다. 본인 생일이 더 빠른 핑계로 언니라며 걱정 말고 실컷 먹으라는 귀여운 나의 친구. (내 덩치가 두배이니 더 귀여울 수밖에) 무슨 바람이 불었나 간단한 식사가 아니었다. 그날 그녀는 거하게 한우를 쐈다.


슬픈 마음을 뒤로하고, 누군가 익숙한 솜씨로 구워주는 소고기를 먹었다. 엄마가 챙겨주시듯 내 접시에도 조금 친구 접시에도 먹기 좋게 담아주시면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이는 없지만 맛있는 음식은 입에 달았다. 없던 식욕까지 돌아왔다. 고기를 먹고 후식으로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끓는 것을 보며 친구가 그랬다.


"오늘은 꼭 사주고 싶었다. 임산부한테 소고기가 좋데. 아이가 잘 있다면 먹고 튼튼히 자라면 되고, 또 혹시 아니어도 너도 맛있는 거 먹고 건강하면 좋지. 스트레스받지 말고 건강하자."


알고 그랬는지 모르고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실패했다고 보내는 위로도 아니고, 무조건 될 거야 걱정 마 하는 희망 고문도 아니어서 그 말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단순하게 날 걱정해주던 따뜻한 친구의 말 한마디. 배려 가득한 그녀의 선물에 답답했던 마음에 한결 위로가 되었다. 따뜻한 음식이 상처 받은 영혼을 달래준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날의 따뜻한 된장찌개 맛을 잊을 수가 없다.




나이가 들수록 위로하는 것도, 위로받는 것도 어려워진다. 특히 난임은 당사자한테도 남에게도 예민한 문제라 쉽게 말을 꺼내기도 어렵고, 어떤 위로를 전해도 오해로 변질될 소지가 있는 대화 소재 중 무척이나 고난도 주제다. 그런데 그날 내 마음이 따뜻해졌고, 내 괴로움과 슬픔이 조금이나마 나아졌던 것은 친구가 많은 말을 하지 않아 주어서였던 것 같다. 진정한 위로가 꼭 말일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딴생각을 지워주는 지글지글 소고기, 보글보글 끓어가는 된장찌개도 모두 친구의 계산 안에 있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젠 시간이 지나 그녀가 쌍둥이를 임신했다. 임신 소식이 내 일처럼 기쁜데, 아주 멀리 직항도 없는 마드리드에 사는 것이 안타까울 뿐. 소고기의 은혜를 갚으로 가야 하는 데 말이다. 얼른 입덧도 끝나고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게 되기를. 친구를 닮아 마음이 따뜻한 두 아기이기를. 부디 우리 집 아기들처럼 38주까지 건강하게 쑥쑥 자라 딱 정해진 그 시간에 무사히 만날 수 있기를 매일매일 기도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