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선인’ 외
종전 한국에서 너무 오래 머물다 와서 주재원 생활 감이 한참은 떨어진 나는 이 곳에 와서 (개)고생하였다. 그래서 정리해보았다. 주재원 아내 생활에 필요한 10가지.
주재원 아내 생활에 필요한 10가지
1.정보
2.선의를 가진 사람
3.고국휴가
4.운동
5.피지오테라피스트
6.상담자
7.취미생활
8.신앙공동체
9.한국음식
10.공부
1.정보
개도국은 선진국과 달리 정보가 생명이다. 정보가 어디 게시되어 있지도 않고, 홈페이지에 업데이트 되어 있지도 않다. 그래서 정보 하나하나, 심지어 아주 세세하게는 어느 브랜드의 소세지가 비리지 않냐까지(아는데 일년 반 소요) 알기가 쉽지 않다. 생활정보력은 어디서 팔지도 않고 모두 사람에게서 나온다. 어디에서 요가를 하는지 필테를 하는지 노래수업을 듣는지, 어느 선생이 좋은지, 어디서 무얼 사야되는지 재료공수 등등. 그래서 이 곳 처럼 험지에 처음 정착하는 사람들은 기를 쓰고 모임에 들어가고 인맥을 맺는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 개중에는 있다. 그치만 극소수이다. 이미 정착한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듯이 자신의 처지가 바뀌니 굳이 새로온 사람을 챙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챙겨봤자 자신이 얻을게 하나 없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이해관계에 따라서 움직이는 이들을 볼 수 있는 현장 바로 해외이다. 이들은 정보력이 있는 곳에 응집되어 있고, 그 곳에 매진한다. 목적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보력에 있기 때문이다.
이 곳에 와서 느꼈다. 정보는 눈에 보이는 돈으로 환산하지 않지만, 분명 값이 매겨진다. 알짜배기 정보는 친해지지 않는 이상 쉽게 나오지 않는다. 이걸 아는 사람들, 주재원 아내 짠밥 N년차들/애송이들은 기를 쓰고 정보력 있는 이들과 친해진다. 이것저것 다 귀찮은 나 같은 사람은 그렇게까지 노력하지 않는다...
2.‘선의’가 있는 사람
앞서서도 얘기했듯, 주재원 와이프의 삶에 너무나 중요한 ‘사람’. 주재원들은 몇 년 단위의 로테이션으로 도착한 시점이 맞지 않으면 금방 이별할 수도 있다. 아울러 교민들은 주재원들을 몇 년 후면 금방 가는 이들이라고 굳이 친해지려 하지 않기도 한다. 그렇지만 개중에 오픈 마인드가 있다. 다행히 있다. 그리고 이미 정착을 마친 주재원들 중에도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눈에 불을 켜고 이런 보물 같은 이들을 찾아야한다.
앞서말한 이 ‘선의’ 이것이 누구에게나 있는 줄 알았다. 그런 선의를 가진 사람을 잘 만나야한다. 그런 사람 하나면 주재원 아내의 삶이 별안간 잘 풀리기도 한다. 1번 정보를 2번 ‘선의’를 가진 이가 해결해준다.
3. 고국 휴가
멘탈이 붕괴될 때는 무조건 고국행. 파견지에서 멘탈 파괴되면서 버틸 필요는 없다. 국제기구에서 일년에 한 번 씩 직원들을 고국에 보내주는 건 돈이 남아돌아서가 아니다. 멘탈 관리하고 가족과 친구의 품으로 돌아가서 재충전하고 와야 일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엔 멋모르고 좋아보인 이런 제도들이 왜 생겼는지 처절하게 경험하고 나자 이해가 갔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복지는 고용주의 입장에서 다 이유가 있어서이다(오래 일 시키려면 미리미리 고쳐서 써야하기 때문...).
게다가 긴 방학 때 국제학교 학생들은 대부분 고국으로 다녀온다. 그 때 덩그러니 애랑 친구도 없이 방학을 보내고 싶지 않으면 잠시 한국 다녀오는 게 좋다.
4. 체력을 건사할 운동 한 종목
새로운 환경에서는 체력관리가 필수이다. 운동을 하다보면 행동반경이 넓어져 새로 사람을 만나는 계기도 되고, 몸도 건강하게 관리할 수 있는 일석이조이다. 필수. 운동 할 수 있는 곳도 여러곳이라 경쟁을 하는 구도가 아니기 때문에 희소성이 있다. 따라서 어디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강사가 수강생을 선별적으로 받는다. 가령 필라테스는 이 도시에 리포머를 보유한 사람이 유일하게 그 강사 한 명이기 때문에, 수강생은 누구에게 소개 받고 왔는지 상세하게 답할 각오를 해야한다.
5. 몸/마음 관리 피지오테라피스트
한국에서는 도수치료, 추나치료 등 많지만 해외에서는 피지오테라피스트가 있다. 나이 40 넘으면 운동하면서도 관리해주어야한다. 그래서 수시로 방문하게 되는 치료사. 뭐라 불러도 좋다. 대부분 이들은 몸도 치료해주지만, 주재국 생활의 고민에 대해서도 꽤 좋은 상담역할을 한다. 주재국 사람이라 그 사회를 잘 알기에, 그와 이야기를 주고받다보면 문화에 대한 지평이 넓어진다. 수다 떨 수 있는 친구 하나가 생긴 느낌. 대부분 이런 직업을 가진 이들은 세계 어디든 잘 떠든다. 환자와 한 시간 가량 치료를 진행하는 사람들이라, 이런 대화에 익숙하기도 하고 능통하기 때문이다. 그들 입장에서도 한 시간 내내 주구장창 말 없이 치료만 하는 건 지루하다.
6. 상담자-마음을 터 놓을 사람 한 명
해외에 나오면 별의 별 사람을 다 만나게 된다. 한국에서 만난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피상적인 관계, 이용하려는 관계(정서든 물질이든 정보든 뭐든) 등등. 이런 전쟁터에서 정신 붙들어매고 살아남으려면, 마음 터 놓을 친구 하나는 필요하다. 그치만, 막 도착해서 마음 터 놓을 친구 하나 없다면, 한국에 있는 친구건, 외국에 있는 친구건, 돈을 주고 얘기할 수 있는 상담사건, 내가 무슨 말해도 누설되지 않는 게 보장되는 성직자든 누구든 잡고 마음을 터 놓는 게 필요하다.
이걸 하지 않게되면, 새로운 환경에 놓여서 만나게 되는 온갖 포식자들로 인해 스트레스로 정신이 나날이 피폐해진다.
7. 좋아하는 취미생활
뻔한 얘기지만, 자신만이 즐길 수 있는 취미생활 하나는 기본이다. 처음에 친구 사귀기 전 외로운 단계에 내 시간을 채워줄 친구. 그게 악기든, 책이든, 글쓰기든 스쿠버다이빙이든 뭘 배우는 거든 뭐든 내가 좋아하고 내 시간을 채울 수 있는 거면 된다. 피아노를 배우는 사람도 있고, 퀼트를 배우는 사람도 있다. 자기에게 맞는 게 무엇이든, 매번 해외 생활에 나갈 때마다 독립적으로 할 수 있는거면 괜찮다.
8. 신앙 공동체
여러 부분이랑 겹치는 내용이긴 하지만, 신앙 공동체는 가장 쉽게 넓게 한국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루트이기도 하다. 종교가 없는 사람은 어쩔 수 없지만, 종교가 없지만 여러 이유로(아이가 관심 있어서, 주일학교에 아이를 맡길 수 있어서 등) 교회에 적을 두고 있는 한국인들이 많다. 다른 주재국에서도 그래왔다. 수 많은 정보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장이 저절로 형성되는 곳이기 때문에 가장 손쉽다. 게다가 언제든 관심있는 자는 환영한다. 다만, 종교라는 건 믿고 싶다고 믿어지는 의지의 문제는 아니니까 억지로 사람 만나러 가는 건 참 쉽지 않을 듯하다.
9. 한국음식
너무 중요한 음식.
우리나라처럼 음식문화가 발달한 나라는, 어디가나 고향의 맛을 찾기 마련…한국음식은 너무 중요하다. 마음이 울적할 때도 소울푸드 처묵처묵하며 우리는 얼마나 힐링하는가.
파견국에 한국식당이 몇 개 있는지도 중요하지만(파견국의 난이도 레벨과 얼추 비슷. 고로 셀 수 없이 한국식당 많은 동남아 국가들과 상황 매우 다른 험지를 이야기합니다), (손수 하지 않으면) 한국음식 먹을 기회가 많지 않은 험지에서는 한국음식을 잘 하는 사람 곁에 사람이 몰린다. 물론 자기가 음식을 잘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그런 보물 같은 존재가 되어 줄 수 있다. 음식을 잘 하고 퍼 주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대다수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기에 의외로 이런 사람을 기가막히게 빠르게 알아보고 접근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실제로 이런 이유로 친하게 지내려고 하는 사람이 있냐 물으신다면, 있습니다… 이건 저만의 생각이 아닌...
10. 자기개발
그게 무엇이 되었든, 파견국에 갈 때마다 공부를 시작하는 걸 추천한다. 고국을 매번 떠나오면서 하던 일도 버리고 따라나서야 되는 주재원 아내는, 전업주부로 살아가길 원하거나, 휴직할 수 있는 직장이 있거나 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특히 커리어 전환을 꿈꾸는 이들에게 자기개발이 필수이다. 물론 아이가 너무 어린 경우는 어쩔 수 없지만.
왜냐 한국에 돌아갔을 때 마주하는 것은, 경력 단절된 커리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대면 시대인 요즘, 수많은 강좌들, 심지어 학위도 딸 수 있게 된 요즘, 목표를 세우고 자기개발을 하면서 보내면, 뒤돌아봤을 때 그 몇 년이 헛되지 않다.
대부분은 언어공부도 많이 하지만, 주재원 파견 기간에 석사학위 따는 언니도 봤다(언니 브라보!).
정리해보니 주재원 아내 생활에는 참 많은 것이 필요하지만, 독립적인 영역 외에 다른 영역에서는 공통점이 발견된다. ‘사람’만 잘 만나면 된다. 여기서 꼬이면 주재원 몇 년 생활이 꼬이거나 처음부터 이상한 인간관계에 투자하면 시간 낭비가 어마어마하다. 결국 사람을 잘 만나면, 정보도 얻지만 멘탈 관리도 되고 생활 전반이 순조롭게 흘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사람!
이런 주재원 아내들의 고군분투는 솔까말하지 않는다. 내가 조용히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는 걸 입 밖에 꺼내지 않는다. 아주 은밀하게 이루어진다. 마치 백조가 물 아래에서 치열하게 물장구를 치면서도 우아하게 호수가를 떠다니듯. 밖에서 볼 때는 우아하게 떠다니는 모습만 보일 것이다.
물 속을 잘 들여다보라…그녀들의 물장구가 눈에 불현듯 너무 선명하게 들어올 수도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