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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재원 아내와 재택근무

사라진 인생

by 미미

재택근무의 실상

얼마전 3개월 계약을 체결했다.

재택근무가 안 되는 업무는 아니었기에 재택으로 풀타임 근무가 가능한지 보자는 업주의 의견이었다.


재택근무라서 꿀일줄 알았던 건 큰 오산이었다. 매일 매일 정해진 양과 업무에 비록 사무실 출근을 안 할지라도 하루 온 종일 새벽 기상부터 저녁 때때로 늦은 시간까지 노트북 앞에 앉아있다.


번역도 해본 적 있지만, 주어진 책을 통째로 번역하고 중간에 한 번 편집자에게 원고 넘기고, 편집자의 피드백을 받고 서로 왔다갔다 하는 정도였지, 이렇게 호흡이 짧은 성격의 업무가 아니었다.

나는 현재 특정 콘텐츠 감수를 보고 있다. 이 콘텐츠는 업무 프로세스 중간에 기한을 한 명이라도 안 맞추면, 도미노처럼 딜레이가 된다. 마치 모던타임즈의 찰리 채플린처럼, 공장 노동자처럼 앉아서 나사를 하루종일 조이다가 퇴근하는 느낌이다.


아이를 돌아볼 시간도, 요리할 시간도 없다. 그렇게 일만하니 아이에게 도시락 싸줄 시간이 없어 하루는 새벽에 일 대신 요리를 했다.


그 동안 한가하게 지냈던 세월이 옛날 얘기 같았다. 순식간에 나의 시간은 많은 주재원 아내들의 시간과는 다르게 시속 200km로 달리는 중이다.


일을 시작하면서 여러가지 고민이 든다. 아이와의 시간을 뒤로 하면서 이렇게 사는 게 맞는건지, 그렇다고 일을 그만두면 나중에 내가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등.


나는 언어를 좋아한다. 한국어도 외국어도. 가르치는 것도 읽는 것도 쓰는 것도. 새로운 단어를 배우는 것도 모두 즐겁다. 내가 좋아하는 분야에서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즐거운 일이다. 다만 업무량에 치여서 정신이 없다. 아이를 키우면서부터 풀타임 근무는 내게 너무나 버거운 근무형태가 되었다. 처음부터 프리랜서를 주장했으나 고용주는 정규직원을 채용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번주만 저녁에 예정된 ㅇㅇ만찬 (친구 주최) 하나 펑크 내고, 저번 주는 겨우겨우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그 전 주 대사관 주최 한국영화제 행사에도 마지막 순간까지 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예전에도 직장 근무할 때 어느날 야근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재택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시간이 자유롭지 않다. 다시 매인 느낌이다.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일을 안 하면 가치롭지 않게 느껴지고, 일을 하면 허덕여서 쉬고싶은 이 기분.


일은 내게 어떤 의미인가?

일과 소명을 분리하게 된 지도 비록 얼마되지 않는다. 그 동안 일과 소명을 같이 만족하는 일을 하려다보니 직장 선택에 제약이 많았다. 내게 일은 내게 주어진 능력으로 경제활동을 하는 것이며, 소명으로는 내게 주신 능력으로 맡겨주신 직무를 수행하는 부분이다. 나의 소명은 점점 뚜렷해지고 구체화되고 있다.


내게 어딘가 소속되어 일 한다는 건 자유를 의미했다. 그리고 자유를 의미하는 그 ‘일’에 전업주부는 포함된 적이 없었다. 시간당 환산해서 전업주부의 월급을 계산한 적 있었는데, 그렇게치면 왠만한 회사 월급과 비등했다. 전업주부라는 직업이 갖는 경제적 가치는 증명이 되었건만, 밖에서 하던 일을 그만두는 순간 알 수 없는 무엇이 내 인생에 빠진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어딘가 소속되어 일을 시작하면 (시간적) 자유가 사라지는 이 아이러니란…! 그 사이에서 계속 진퇴양란의 느낌이다.


소명이 더욱 뚜렷해질수록, 경제활동을 위한 일을 병행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된다. 만약 내 소명이 내 시간 전부를 차지한다면, 더 이상 경제활동을 할 틈이 없을 것이다. 많은 선교사들, 신부님, 수녀님들은 소명을 받아 생활한다. 그리고 경제활동은 하지 않는다. 그치만 살아갈 수 있을만큼은 주님이 다 마련해주신다. 하지만 나는 수녀님 신부님 선교사도 아니고 세속에 사는 평신도이기에 경제활동은 필수라고 생각해왔다. 아니면 나의 믿음이 부족한 것인가? 내가 하느님 일에 헌신하지 못하는 것인가?


시간을 두고 생각해봐야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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