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맛을 일깨워 준 쿠스쿠스
나는 친구와 함께 세비야를 여행하는 중이었다.
때는 8월 초. 세비야가 속한 안달루시아 지역의 여름은 무덥기로 유명하다. 40도를 웃도는 맹렬한 폭염이 도시 전체를 달궈버리는 시기이다. 전날에는 오후 5시쯤 세비야 광장을 찾았다가 '타는 듯한 더위'를 문자 그대로 맛보았다. 태양이 내리 꽂히는 곳에 서 있으면 피부 표면이 따끔거리다 못해 고통이 느껴질 정도였다. 중앙에서 광장 전체를 담아내기 위해 그늘 하나 없는 광장을 가로지를 때는 마치 사막을 가로지를 때 느낄 만한 아득함을 느꼈다.
전날의 고생이 기억에 생생해서일까, 다음 날은 도시의 그늘을 최대한 벗어나지 않기로 결심을 하며 숙소를 나섰다. 그러면 뭐하나. 아침을 먹고 알카사르(Alcazar)를 둘러보았는데, 제아무리 녹음이 우거진 알카사르라 할지라도 무덥기는 매한가지였다. 알카사르를 둘러보고 나서는 부리나케 호텔로 돌아와 에어컨을 켜두고 휴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창문을 열면 알카사르와 세비야 성당이 보이는 거리에 위치한 호텔을 예약한 것이 신의 한 수였다.
하지만 달콤한 휴식도 오래 지나지 않아 막을 내려야 했다. 더위를 달랜 다음에는 허기가 몰려왔던 것이다. 창 밖을 내다보니 아직 따가운 햇볕이 기승이었다. '우리 나가거든 그늘만 걷자'는 친구의 말에 나는 눈썹을 일자로 하고 결의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우리는 마음의 채비를 단단히 해야만 했다. 꿈만 같았던 휴식과 시원한 호텔방을 뒤로한 채, 먹기 위해 다시 불타는 세비야의 거리로 나왔으니 먹는 일이란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트립어드바이저를 통해 미리 알아둔 타파스 전문점으로 가는 길까지 그늘이 많이 져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분명히 지도에서 본 대로 왔다고 생각했는데도 우리가 찾는 타파스 전문점은 도통 보이질 않았다. 좀 더 확실한 지점까지 돌아갔다가 다시 길을 돌며 식당을 찾아보았으나 이제는 더 헷갈릴 뿐이었다. 핸드폰을 각자 손에 쥐고 같은 곳을 뱅뱅 돌기 시작한 지 15분 남짓. 내리쬐는 더위에 몸은 뜨겁게 달아오르는데 반해 우리를 고생시키는 타파스 전문점에 대한 마음은 차게 식어갔다.
"우리... 거기 말고 다른 데 갈까?"하고 친구가 물었을 때, 나는 아까부터 왔다 갔다 하며 두 번을 마주친 '쿠스쿠스'를 파는 식당을 생각하고 있었다. '쿠스쿠스.' 좁쌀 같이 생긴 작은 파스타의 일종이라는 것만 알 뿐, 쿠스쿠스로 만든 요리가 어떤 모양새일지, 한 번도 생각을 해본 적이 었었다. "거기가 어딘데?"라고 물으니 "너 혹시 쿠스쿠스 괜찮아?" 하는 물음이 나왔다. 야호! 마음이 통한 것이다. 우리는 뭔지는 잘 모르지만 그 '쿠스쿠스'라는 것을 먹어보기로 했다. 친구 말로는, 식당 앞에 펼쳐진 사진을 보니 좁쌀밥처럼 생긴 것이 먹으면 속이 든든할 것 같다는 것이었다. 어제는 점심에 이베리코 돼지로 만든 타파스와 양고기로 만든 타파스를 먹었고 저녁으로는 샌드위치를 하나 먹었었다. 확실히 밥 같은 식사가 당길 때가 되었다.
식당은 한산했다. 손님이라고는 우리 밖에 없었기 때문에 식당의 인테리어가 한눈에 들어왔다. 벽면에는 아라비안 나이트의 한 장면 같은 벽화가, TV에서는 알 수 없는 꼬부랑글씨로 가득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궁금함에, 메뉴판을 건네주러 온 종업원에게 여기서 파는 요리가 어느 나라의 요리인지 물었다. 종업원은 먼저 식당의 주방장이자 주인은 모로코인이고 자신은 파키스탄 사람임을 밝혔다. 이어 사실 요리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른다는 점을 고백했다. 일을 시작한 지 오래되지 않았다고. 우리는 직접 요리를 하는 주인이 모로코인이니 모로코 요리가 아니겠느냐고 어림짐작을 했다. 메뉴판을 살펴본 뒤, 소고기 쿠스쿠스와 타불레(Tabbouleh), 돌마(Dolma)를 주문하였다.
종업원이 쿠스쿠스 한 접시를 식탁에 올렸을 때, 그 푸짐함에 우리는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엄청나게 큰 널따란 접시 위에 쿠스쿠스가 넓게 깔려 있었고 육수가 촉촉이 뿌려져 있었다. 그 위에 장식하듯 올려진 것은 호박, 당근과 같은 야채와 장조림처럼 부드럽게 익은 소고기 덩어리들이었다. 접시의 크기로 보았을 때 쿠스쿠스만으로도 이인분은 되어 보이는 양이었다.
"내가 이런 게 먹고 싶었어."
친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런 밥 같은 걸 먹어야 제대로 먹은 것 같다니까."
아니나 다를까, 쿠스쿠스에 허겁지겁 손을 뻗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빠른 속도로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샌드위치나 타파스 조금으로는 안된다고, 밥 같은 걸 먹어야 힘을 내겠다는 자신감 가득 찬 말을 내뱉고 식사를 시작했으나 그 말이 너무 오만방자했기 때문일까. 더 이상 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스푼을 내려놓았을 때, 아직 쿠스쿠스는 삼분의 일은 넘게 남아있었다.
먹는 것을 좋아하는 만큼 나는 여행지를 알아보는 것뿐 아니라 식당을 알아보는 것에도 꽤나 정성을 들인다. 사실 별다른 비법이 있는 것은 아니고, 한 도시를 여행하기 전 트립어드바이저나 구글맵 등을 살펴보며 그 도시의 식당 중 어디를 갈 것인지 후보를 몇 개 정해두는 것 정도이다. 수많은 식당 중 가격이나 메뉴, 분위기 상으로 내 취향에 딱 맞는 맛집을 몇 개 골라두고 나면 괜한 애착이 생기기 마련이어서, 길을 잃거나 시간이 모자라 그 맛집을 놓쳤을 때 크게 상심하곤 한다.
이번은 달랐다. 비록 많이 남기긴 했지만 나는 쿠스쿠스에 크게 만족했다. 한국에서 중동요리를 먹을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랍인들의 흔적이 곳곳에 유적으로 남아있는 안달루시아에서 먹는 쿠스쿠스는 또 얼마나 의미가 있는가! 재미있는 점은, 지금에 와서는 쿠스쿠스에 대한 기억만 남아있을 뿐 원래 그토록 방문하고자 했던 타파스 전문점이 어디었는지는 아예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쿠스쿠스로 말미암아, 나는 모로코가 속한 북아프리카와 중동 요리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국에 돌아온 후 유튜브에서 찾은 레시피를 응용하여 전기밥솥으로 세비야에서 먹은 쿠스쿠스 요리를 재연해였으니, 그것이 바로 내가 브런치에 올린 첫 요리글이었다. 세비야의 무더위에 지치지 않았다면, 또 지친 마음에 원래 가려던 식당은 포기하고 가까운 식당에서 밥 같은 요리를 먹어보자는 친구와 마음이 맞지 않았더라면, 브런치에 요리에 관한 글을 연재하는 일은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더 나중의 일로 미루어졌을 것이다.
여행지에서 우연은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하고 마법 같은 기쁨을 누리게도 한다. 세비야에서 만난 쿠스쿠스는 우연이 내게 선사한 큰 선물이었다.
'쿠스쿠스(couscous)'는 중동(Middle East) 지역의 요리라고 알려져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쿠스쿠스는 중동 중에서도 모로코와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등의 북아프리카 지역을 대표하는 요리이다. 이 지역의 토착민이 개발한 요리라고 알려져 있으며, 교류를 통해 동쪽의 이집트, 서아시아 지역으로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 지금과 같이 대표적인 중동 요리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한다.
짚고 넘어갈 점은, '중동'이라도 다 같은 '중동'이 아니라는 점이다. 중동(Middle East)은 서구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다분히 서구 중심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19세기에 유럽인들은 동쪽의 인도와 서쪽의 유럽(중에서도 지중해 지역) 사이의 드넓은 지역을 묶을 어휘가 필요했다. 중동(Middle East)이라는 단어는 인도처럼 너무 동쪽도 아니고 유럽의 서쪽도 아닌, 동쪽에 가까운 어딘가의 지역을 지칭하기에 적당했을 것이다. 누군가 나서서 '중동'의 개념을 정리한 적은 없었으나 이때까지만 해도 '중동'은 주로 아라비아 지역만을 일컫는 현재보다 좁은 범위의 땅을 지칭하는 어휘였다고 한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고 이 사태를 주변국들이 처리하는 역사적인 급변기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중동'은 북아프리카와 아라비아, 이란과 이라크,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까지 거대한 지역을 통칭하는 개념으로 확장되어버렸다. 물론 이를 애용한 것은 주로 서방의 전략가들과 신문들이었다. 이들은 단지 '세계의 화약고'라고 불릴 정도로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혼란의 땅을 하나로 묶어 지칭할 수 있는 손쉬운 단어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나를 포함하여 많은 이가 '중동'을 이야기하지만, '중동'이라는 단어에는 지역 내의 문화적, 민족적 다양성에 대한 배려가 생략되어 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중동'이 의미하는 범위가 지나치게 넓다면, 이보다 좀 더 좁은 범위의 지역을 지칭하는 단어가 몇 가지 있다. '레반트(Levant)'와 '마그레브(Maghreb)', '마시리크(Mashriq)'가 바로 그것이다.
'레반트(Levant)'는 지중해 동쪽의 레바논, 팔레스타인, 요르단, 시리아, 사이프러스, 이스라엘 지역을 일컫는 지리적인 개념이다. 이탈리아어의 '레반테(Levante)'에서 유래한 단어로, '레반테'는 '떠오르는(rising)'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떠오른다는 것은, 다분히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을 의도한 의미일 터이다.
'마시리크(Mashriq)'는 '레반트'와 그 의미가 비슷하지만 그 어원이 유럽어가 아닌 아랍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마시리크는 '빛나다 또는 떠오르다'를 의미하는 동사 'sharaqa'에서 기원한 단어로, '태양이 떠오르는 곳(동쪽)'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집트 동쪽의 지역, 즉 레바논, 팔레스타인, 요르단, 시리아, 이라크 등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마그레브(Mahgreb)'는 '일몰'을 의미하는 단어로, '마시리크'와 대칭을 이루는 단어이다. 이집트를 제외한 이집트 서쪽의 국가, 즉 모로코와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를 지칭한다. 이 마그레브 지역의 토착 민족이 바로 푸른색의 터번으로 잘 알려진 '베르베르인(Berbers)'이다. 이들은 승마와 전투에 능한 유목민족으로, 7세기경 아랍인이 침입하였을 때 수십 년에 걸친 전투로 저항할 정도로 이들을 거세게 반발하였으나 점차적으로 이슬람교와 아랍어를 받아들이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다. 현재 대부분의 베르베르인은 아랍어를 쓰고 이슬람교를 믿지만 지금까지도 베르베르 어를 쓰며 독자성을 유지하는 집단이 소수 존재하고 있기도 하다.
많은 학자들은 쿠스쿠스를 처음으로 만들기 시작한 이들을 바로 이 베르베르인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쿠스쿠스는 듀럼밀을 으깬 세몰리나를 쪄서 좁쌀 만한 덩어리가 되도록 뭉친 후 건조하여 만드는 작은 파스타의 일종이다. 하지만 베르베르족이 쿠스쿠스를 처음 만들었을 때부터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은 밀을 대신하여 이 지역에서 구하기 쉬웠던 수수(millet)로 쿠스쿠스를 만들었다는 점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쿠스쿠스를 만드는 것은 손이 많이 가는 고된 일이지만, 일단 만들고 나면 건조된 상태로 오래 보관할 수 있고 요리하기가 단순하기에 유목민족인 베르베르인들의 삶의 방식에 적합한 요리였다고 한다.
다만 사료의 부족으로 인해, 쿠스쿠스의 개발 시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빠른 경우 기원전 200년부터 베르베르인이 쿠스쿠스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추측도 있다. 13세기경에는 마그레브 지역은 물론 서아시아 전역에 쿠스쿠스가 널리 알려졌다. 또한 지중해 건너 스페인의 그라나다에 자리 잡은 나스리(Nasrid) 왕족들 사이에서도 인기 있는 요리였다. 하지만 레콩키스타 이후 스페인인들이 이슬람 문화에 대한 반감을 거리낌 없이 표출했기에 그 과정에서 쿠스쿠스의 입지가 급격히 약화되었다. 안달루시아 지역에서는 빵가루를 볶아 만드는 미가스(Migas)가 쿠스쿠스의 자리를 대체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탈리아에서는 시실리의 쿠스쿠스 요리가 특히 유명하다. 시실리의 쿠스쿠스는 이 지역이 무슬림의 지배를 받았던 9~11세기 사이에 전파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해산물이 곁들여지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듯 쿠스쿠스는 마그레브 지역에만 한정된 요리는 아니다. 서아시아 전역은 물론 아랍 문명과 깊이 접촉한 경험이 있는 스페인과 이탈리아, 북아프리카를 식민 지배한 전적이 있는 프랑스에도 널리 알려진 국제적인 요리 재료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쿠스쿠스를 '가끔씩 먹는 요리 중 하나' 정도로 여긴다면, 모로코인과 알제리인, 튀니지인들을 비롯한 마그레브 지역의 사람들은 쿠스쿠스를 자신들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리로 여긴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쿠스쿠스를 단순히 '중동 요리'의 하나로만 본다면, 가장 속상해할 이들이 바로 마그레브 지역의 주민들인 것이다.
이들의 쿠스쿠스 사랑은 알제리 사람들이 쿠스쿠스를 부르는 이름에서도 잘 드러난다. 알제리 사람들은 쿠스쿠스를 'kisksū' 또는 'ṭacam'이라고 부른다. 이 중 'kisksū'는 '잘 굴려진(well-rolled)'이라는 의미의 베르베르어 'seksu'와 그 의미가 유사하다. 'ṭacam'의 경우, 외려 한국어의 '밥'과 그 의미가 일치한다. 'ṭacam'은 쿠스쿠스뿐 아니라 '음식' 또는 '양분'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밥'이 한국인에게 큰 의미를 가지듯이, 쿠스쿠스가 이들의 일상에서 지니는 중요성의 크기를 보여주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의 레시피]
쿠스쿠스를 자신들의 식문화를 대표하는 요리로 삼는 모로코인들인 만큼, 그들은 쿠스쿠스를 요리할 때에도 정성을 들인다. 모로코식 쿠스쿠스 요리의 대표격은 '모로코식 일곱 가지 야채 쿠스쿠스(Moroccan seven-vegetable couscous)'이다. 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쿠스쿠시에(couscousier)'라는 쿠스쿠스 전용 찜기가 필요하다. 이 찜기는 2 단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아래쪽 찜기에서는 고기와 채소를, 위쪽 찜기에서는 쿠스쿠스를 찐다. 이렇게 한 솥에서 고기와 쿠스쿠스를 찌면 고기의 향이 쿠스쿠스에 고루 배어 훨씬 맛있는 쿠스쿠스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한 번 쪄낸 쿠스쿠스는 반드시 한 차례 이상 손으로 비벼서 고슬고슬하게 만드는 정성을 들여야 한다.
참고한 유튜브 동영상은 Cookingwithalia 채널의 "Couscous with Seven Vegetables"(https://www.youtube.com/watch?v=GfNRbVquluA)레시피이다. "일곱 가지 야채가 들어가는 쿠스쿠스 요리"가 요리의 이름이라고는 해도, 어디 그 일곱 가지가 한 가지만 있으랴. 일곱 가지 야채에도 약간의 베리에이션은 있다. 그럼에도 많은 레시피가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채소를 간추려볼 수 있는데, 당근, 애호박(쥬키니), 가지, 단호박 또는 고구마, 터닙(turnip), 파프리카, 양배추, 홍고추, 이집트콩(병아리콩)이 바로 그것이다. 고기는 보통 송아지나 소고기, 양고기를 쓴다. 하지만 고기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채소의 맛만 즐기는 경우도 있다. 시즈닝에는 소금, 후추, 양파, 터머릭, 샤프란, 생강, 생토마토 등이 들어간다. 내가 세비야에서 먹었던 쿠스쿠스도 이 "일곱 가지 야채가 들어가는 쿠스쿠스 요리"와 비슷한 요리였다. 다만 채소의 가짓수가 좀 모자랐을 뿐.
요리를 할 때 최대한 원래 레시피를 그대로 따르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자취방 사정상 아무래도 레시피를 변형해야 할 때가 있다. 이번이 더욱 그랬다. 특히 터닙이라든지, 샤프란이라든지 하는 것은 구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고기도 풍족하게 먹고 싶은데, 만 원 언저리로 소고기를 산다면 아마 내 두 손바닥 남짓한 크기로만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쿠스쿠스 전용 찜기는 또 어떠한가. 쿠스쿠시에는커녕 그냥 찜기도 없는 형편이다. 사실, 쿠스쿠스 전용 찜기가 없어도 맛있는 쿠스쿠스 요리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내 부엌의 현실에 맞추어 레시피를 재단해 보았다.
[요리 재료]
1. 쿠스쿠스류: 쿠스쿠스, 물, 소금, 버터(원래 모로코식 쿠스쿠스 레시피에서는 쿠스쿠스를 찜기에 쪄서 요리한다. 하지만 나는 인스턴트 쿠스쿠스를 사용하였으므로 패키지 뒷면에 있는 레시피를 그대로 따르기로 하였다)
2. 야채류: 당근, 애호박, 가지, 양파, 마늘
3. 고기류: 아무 종류의 고기 먹고 싶은 만큼 많이
(쿠스쿠스에는 주로 소고기나 양고기, 염소고기가 사용된다. 그러나 나는 자취생이다. 비싸디 비싼 소고기나 양고기를 사서 고기를 쬐끔 올려먹느니, 다른 선택을 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이율배반적으로, 대부분의 모로코인들은 종교상의 이유로 먹지 않을 돼지고기 뒷다리를 사용했다. 이유는 단순히 이 부위가 고기 중에 가장 쌌기 때문이다. 무려 100g에 890원. 딱 1kg 정도 샀는데 비계는 미리 떼어냈으니 실제 요리한 것은 그것보다 약간 적을 것이다)
4. 시즈닝류: 샤프란, 파프리카 파우더, 터머릭, 세이지, 타라곤 리브즈, 딜씨드 분말, 씨겨자, 후추, 소금 등. 터머릭과 소금, 후추를 제하고는 찬장 상황에 따라 더하거나 제해도 된다.
[모로코식 쿠스쿠스 조리법]
야채와 쿠스쿠스는 조리시간이 짧은 반면, 고기는 오래도록 쪄서 부드럽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 고기를 먼저 준비하자.
1) 고기를 손질한 후 마리네이드 한다.
고기를 시즈닝 할 때에는 향신료와 허브로 고기를 문지른 다음에 올리브유를 뿌리는 것이 낫다. 그래야 고기 표면에 시즈닝이 밀착될 수 있다. 원래 모로코식 쿠스쿠스 요리에서 핵심적인 시즈닝은 샤프란과 터머릭 파우더인데, 내 찬장에는 터머릭은 있지만 샤프란이 없다. 없으면 없는 대로, 찬장에서 손에 집히는 대로 아무 향신료나 집어넣어 이국적인 풍미가 나도록 해 보았다. 내가 넣은 것은 터머릭 파우더, 파프리카 파우더, 세이지, 타라곤 리브즈, 펜넬 씨드 분말, 소금, 후추, 디죵머스타드(씨겨자)이다. 나중에 예쁜 고기색이 나오는데 파프리카 파우더가 크게 기여했다.
2) 고기를 프라이팬에 올려 겉면을 갈색으로 익힌다.
기본적으로 쿠스쿠스 위에 올라가는 고기는 찜의 형태이지만, 그전에 고기를 팬에 올려 표면을 익히는 과정이 맛을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고기 겉면이 먹음직스러운 갈색빛이 될 때까지 익혀줌으로써 고기 특유의 감칠맛을 증폭시킨다. 브라우나이징(Brownizing)이 목적이기 때문에, 속까지 다 익힐 필요는 없다. 겉면을 익힌 고기는 슬로우쿠커나 압력밥솥에 옮겨 담는다.
3) 팬에 붙은 맛있는 갈색을 디글레이즈(deglaze)하여 고기를 담은 솥에 넣는다.
고기를 익힌 후 팬에 눌어붙은 갈색 찌꺼기에는 고기의 육즙과 결합한 시즈닝이 잔뜩 들어있다. 가히 맛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물질이기에 녹여내어(deglaze)하여 고기 솥에 옮겨 담는다. 레몬즙 약간과 물을 사용하여 디글레이즈 했다.
4) 압력밥솥에 겉면을 익힌 고기, 디글레이즈 한 것, 깍둑 썰기한 양파 한 알과 편 마늘 한 움큼을 넣는다. 모든 재료가 살짝 잠길 정도로 물을 더해 넣고 만능찜 기능을 이용해 찐다.
양파와 마늘의 용도는 시즈닝으로도 잡히지 않을 고기의 누린내를 잡고 맛과 향을 풍부하게 해주는 것이다. 양은 취향껏 조절하면 된다. 찌는 시간도 재량껏인데, 이는 밥솥마다 성능이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쿠쿠 밥솥 만능찜 기능으로 85분을 쪘는데, 고기가 아주 흐물흐물하지 않으면서도 결이 분리가 되고 부드러운 것이 딱 만족스러운 정도였다.
5) 야채를 준비한다.
고기가 익을 동안 채소를 준비한다. 당근 하나, 애호박 하나, 가지 하나를 세로로는 10cm 이하, 가로로는 4 등분하여 자른다. 가지 껍질은 감자 껍질 깎는 칼을 이용하여 일부러 벗겼는데 혹시라도 가지 껍질의 보라색 색소가 고기색을 변하게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6) 단단한 채소(당근과 같은 뿌리채소)를 압력밥솥에 넣고 15분간 익힌다.
드디어 85분이 지났다. 고기는 부들부들하게 잘 익어 있고, 뚜껑을 열자마자 향기가 증기를 타고 온 방 안에 퍼져나간다. 고기가 다 익었으니, 그 위에 준비한 채소를 넣고 더 익히면 된다. 단단한 채소(당근)-연한 채소(애호박, 가지) 순으로 압력 밥솥에 넣는다.
7) 당근이 부드럽게 익으면 연한 채소(가지, 애호박 등)를 넣고 10분간 더 찐다.
8) 채소가 밥솥에서 익을 동안, 쿠스쿠스를 준비한다.
3인분(쿠스쿠스 250g)을 기준으로 물 1/4L, 소금 한 티스푼, 올리브유 한 티스푼을 넣고 끓인다.
물이 끓으면 쿠스쿠스 250g을 넣고 2분간 익힌다. 눌거나 뭉치치 않게 잘 저어 준다.
2분 만에 쿠스쿠스가 물기를 흡수하여 부피가 커졌을 것이다. 버터 3 티스푼 정도를 넣고 아주 약한 불에서 3분간 더 익혀준다. 이때, 포크 등을 이용하여 쿠스쿠스가 덩어리 지지 않도록 잘 풀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바닥이 눌을 것 같으면 물을 아주 약간씩 더해준다. 맛을 보고 필요하면 소금 간을 더해도 된다.
9) 큰 접시에 쿠스쿠스를 올리고, 채소, 고기를 올려 담는다.
쿠스쿠스를 담을 때는 가운데 부분이 오목하게 되도록 살짝 눌러준다. 고기를 담은 자리이다. 가장자리를 둘러가며 익은 야채를 색깔별로 담고, 가운데에 먹음직스럽게 익은 고기를 푸짐하게 올려준다.
남은 국물은 따로 작은 그릇에 담아두었다가 쿠스쿠스 위에 뿌려먹으면 더 맛있다.
향신료 향이 진동을 하고, 고기는 부드럽다. 야채는 달콤하고 국물은 풍미가 진하며 쿠스쿠스는 포슬하고 심심하니 고기와 먹을 때 제 역할을 톡톡히 한다. 모든 재료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여행으로부터 일 년도 넘은 시간이 흘렀다. 기억이 옅어질 때도 되었건만, 지금도 쿠스쿠스 사진을 보면 입맛이 돌고 그때의 기억이 생생히 떠오른다. 당장 지금이라도, 세비야의 무더위에 지친 나에게 힘을 주었던 고기 국물 맛이 깊이 밴 쿠스쿠스를 혀끝에서 고슬고슬하게 굴릴 수 있을 것만 같다. 여행이 주는 가장 큰 선물 중 하나는 바로 맛에 대한 각별한 추억이 아닐까. 맛의 경험은 추억과 호기심을 동시에 자극하여 꼬리의 꼬리를 물고 새로운 경험을 찾아 헤매는 원동력이 되었고, 그것이 오늘날의 나를 존재하게 하였다.
[참고한 사이트]
wikipedia: Couscous
https://en.wikipedia.org/wiki/Couscous
Encyclopedia of the Middle East
http://www.mideastweb.org/Middle-East-Encyclopedia/middle_east.htm
Qura: What is the difference between Mashreq and Levant?
https://www.quora.com/What-is-the-difference-between-Mashreq-and-Levant
Wikipedia: Berbers
https://en.wikipedia.org/wiki/Berbers
Culinary Traditions in Morocco
http://www.mintteatours.com/happy-couscous-day-or-how-in-morocco-friday-couscous/
encyclopedia.com : Couscous
http://www.encyclopedia.com/sports-and-everyday-life/food-and-drink/food-and-cooking/couscous
The New York Times: In the Land of Its Origin, Couscous Is More Than a Quick Fi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