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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랑일랑 Oct 21. 2017

터키:꽉꽉 채우고 싶은 욕구, 돌마와 살마

고추튀김과 순대, 돌마의 상관관계

속을 꽉꽉 채운 요리를 좋아한다.


예를 들어, 튀김 중에는 고추튀김을 으뜸으로 다. 한 입 베어 물면 매큼한 맛이 밴 기름이 쭉 배어 나오고, 앞니가 바삭한 튀김옷을 파고들고 아삭한 청고추를 지나 고기와 당면으로 만든 소에 닿으면 세 가지 다른 질감이 결합하는 독특한 경험이 나를 황홀함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 확실히 단순한 분식 요리로 취급받기에는 상당한 정성이 들어가는 요리이다. 그래서인가, 웬만한 떡볶이집에서는 손이 많이 가는 고추튀김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참 아쉽다. 고소한 김말이 튀김이나 쫄깃한 오징어 튀김은 매콤 달콤한 떡볶이 국물과 찰떡궁합이라 마음에 들지만, 이 고추튀김은 그 자체만으로 식사의 주연을 충분히 차지할 수 있을 고상한 맛의 균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 속을 채워 넣은 요리가 고추튀김뿐일까, 그런 종류의 요리를 줄지어 보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예컨대 순대 또한 속을 비워낸 돼지 창자를 다시 꽉꽉 채우는 과정이 핵심인 요리이다. 오징어 몸통에 온갖 재료를 빵빵하게 채워 넣어 먹음직스럽게 지져낸 오징어순대도 탐스럽기 그지없다. 삼계탕을 좋아하는 이 중에는  닭의 빈 뱃속을 빵빵하게 채워 넣은 찹쌀밥을 별미로 치는 이가 많을 것이다. 닭고기와 한약재의 풍미가 밴 쫀득한 찹쌀밥 없이는 삼계탕을 먹는 일이 허전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어디 이뿐이랴. 어릴 적 할머니가 뜨뜻한 요 밑에 숨겨놓았다가 감기 걸린 손주에게 한 숟갈씩 먹이곤 하셨던 배숙도 있다. 커다란 배의 속을 숟가락으로 파낸 후, 생강과 대추로 속을 다시 채워낸 신기한 모양새의 요리였다. 생강과 대추를 싫어했을 법한데, 달달한 그 맛에 할머니가 입에 물리는 숟가락을 넙죽넙죽 잘도 받아먹었다.


생각해 보건대, 빈 공간을 채우고 싶어 하는 욕구는 인류 공통의 것이 아닌가 한다. 유아기에 사용하는 끼워 맞추기 블록이나 퍼즐놀이가 대표적인 예이다. 빈 공간을 채워서 없애고자 하는 욕구를 놀이로 변모시킨 셈이다. 어디 이뿐인가,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며 걸어둔 양말은 반드시 채워져야 하며, 농구공과 골프공은 그 작은 공간 안쪽을 보란 듯이 파고들어야 한다.


그래서인가, 요리의 세계에서도 인류 본연의 채우고자 하는 욕구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야말로 세계 각지, 도처에 빠짐없이 존재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대개 재료의 속을 비워 공간을 만든 후 이를 다시 다짐육이나 잘게 다진 채소, 곡물로 채워 만든 요리들이다.


프로방스를 여행할 때 맛본 요리 중에는 팍시(farcis)라는 요리가 있었다. 고흐의 마을로 유명한 아를(Arles)의 레스토랑에서였다. 메뉴판이 불어로만 적혀 있어 전식과 본식, 디저트 세 가지를 고르는 일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온갖 잡지식을 동원하여 고르던 중, 먹어본 적은 없으나 대충 들어서 알고 있었던 팍시를 전채요리로 고른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작은 토마토의 속을 파내고 고기나 빵부스러기 따위로 속을 채워낸 간단한 요리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눈 앞에 나온 요리는 한 손에 쥐기 버거울 정도로 거대한 토마토에 다진 허브로 간을 한 다진 소고기를 한 주먹 채워 넣은 작은 햄버거 만한 크기의 요리였다. 이를 어쩌나, 그다음 본식으로 주문한 요리는 소고기 두 주먹은 됨직한 비프 타르타르였던 것을. 의도치 않게 굶주렸던 배를 귀한 소고기로 다시 빵빵하게 채우게 되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또한 이토록 많은 소고기를 접한 일이 없었으니, 갑작스러운 경사에 놀란 위가 터져나갈 지경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아를(Arles)에서 먹었던 토마토 팍시(farcis)


팍시(farcis)는 프로방스 등 지중해에 인접한 프랑스 지역에 전해오는 요리이며, 그 이름은 '속을 채운' 또는 '박제' 등으로 번역된다. 영어로 치면 'stuffed'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표현인 셈이다. 팍시 하면 대체로 토마토 팍시가 유명하지만, 소고기가 든 토마토 팍시 외에도 겉재료나 속재료로 삼을 수 있는 재료는 무궁무진하다. 자주 쓰이는 겉재료에는 토마토와 피망, 가지, 양파, 호박꽃 등이 있으며, 속재료로는 소고기나 소시지, 생선, 빵부스러기, 올리브, 치즈 등이 사용된다.


물론 토마토나 피망 등 채소를 그릇 삼아 속을 채워 넣는 요리는 프랑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터키, 불가리아 등 지중해를 둘러싼 국가들에서 이러한 요리가 유사한 형태로 널리 퍼져있다. 그리스에는 '게미스타(gemista; stuffed)'라고 불리는 속을 채운 채소 요리가 있으며 이탈리아에도 '리피에니(ripieni; stuffed)'라는 유사한 요리가 있다. 스페인에는 피망의 속을 채운 요리인 '피미엔토스 레예노스(pimientos rellenos; stuffed peppers)'라는 요리가 있다. 지중해 근방을 벗어나서도 목록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멕시코의 칠레레예노(Chile relleno; sfuffed chili), 인도의 Bharwan Mirch(sfuffed chili),  일본의 피망노니쿠즈메(ピーマンの肉詰め; 피망으로 포장한 고기), 한국의 고추튀김 등등...


(왼쪽부터) 그리스의 게미스타, 이탈리아의 리피에니, 스페인의 피미엔토스 레예노스

인도의 Bharwan Mirch, 멕시코의 칠레레예노, 일본의 피망노니쿠즈메



그리고 속을 탄탄하게 채운 요리의 세계에서 그 이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나라가 하나 있으 그것은 바로 터키이다.  터키인들은 채소나 기타 재료를 그릇 삼아 속을 채운 요리를 '돌마(dolma)' 또는 '살마(sarma)'라고 부르는데, 그 종류가 실로 다양하다. 지중해를 둘러싼 전 지역에 유사한 요리가 널리 퍼졌다고는 하지만 터키인들은 이 '돌마'를 하나의 요리 분야로 삼고 발전시켜왔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돌마와 살마 요리를 발전시켜왔다.  돌마(Doma)와 살마(Sarma)는 짝꿍처럼 쌍을 이루는 요리인데, 그 이름의 의미를 살펴보면 이해하기 쉽다.


'돌마(dolma)'는 '채워지다(to be stuffed)'라는 의미의 동사인 '돌막(dolmak)'을 명사화한 단어이다. 번역하면 '속을 채운 것(stuffed thing)' 정도의 의미가 된다. 돌마를 위한 '그릇'으로 삼을 만한 재료에는 토마토, 피망, 양파, 쥬키니, 가지 등이 있는데, 속을 파내고도 형태를 유지할 정도의 탄탄함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공통적이다. 속재료로는 소고기, 쌀, 벌거(bulgur) , 다진 양파, 건포도 및 민트 등의 각종 허브가 사용된다. 옛날, 술탄과 귀족들의 밥상에는 건포도 대신 말린 체리와 석류가 등장하곤 했다고 한다. 고기로 속을 채운 돌마는  따뜻한 상태로, 쌀로 속을 채운 돌마는 차게 서브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토마토와 피망으로 만든 돌마


돌마의 종류는 주로 겉재료에 따라 나뉘며, 개중에는 한국인이 보기에 독특한 독특한 조합을 이루고 있는 요리도 많다. 이스탄불의 길거리 간식 '미디예 돌마(midye dolma)'은 그 맛과 저렴한 가격으로 인해 여행자들의 사랑을 담뿍 받고 있는 요리인데, 홍합 속을 파내서 쌀과 섞은 뒤 이를 다시 홍합 껍데기 속으로 집어넣어 만드는 재미있는 요리이다.  오징어 몸통을 통통하게 채운 '칼라마르 돌마(Kalamar dolma)'는 오징어순대와 닮은꼴이다. 어떤 맛일지 감히 상상이 쉽게 되지 않는 요리로, 양고기를 채워 넣은 멜론 돌마(Kavun dolması)도 있다. 오스만 제국의 궁중요리 중 하나였다고 하니 그 맛이 더욱 궁금해진다. 이들에 비하면 애호박(kabak)으로 만든 돌마나 가지(patlıcan)로 만든 돌마, 호박(balkabağı)으로 만든 돌마, 피망(biber) 또는 토마토(domates)로 만든 돌마는 평범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오징어순대를 닮은 칼라마르 돌마와 독특한 외양의  멜론 돌마


한편, 돌마와 쌍을 이루는 '살마(Sarma)'는 '싸이다(to be wrapped)'를 의미하는 동사, '살막(sarmak)'을 명사화한 단어이다. 한국의 쌈요리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아무래도 김밥처럼 속재료를 곱게 감싸서 만드는 요리이다 보니 주로 식물의 잎이 사용된다. 포도나무 잎이나 양배추, 근대 잎 등이 대표적이며, 속재료로는 주로 다짐육을 사용한다. 간혹 쌈을 싸는 방식으로 만든 디저트의 종류를 지칭하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바클라바의 일종인 피스타치오 살마(fıstık sarma)가 그 예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살마는 포도잎으로 속을 싸서 만드는 '야프락 살마(yaprak sarması;stuffed grape leaves)'이다. 속재료로는 고기 또는 곡류가 사용되는데, 새콤한 건과일을 추가하는 것이 터키식의 방식이다. 얄궂게도 이웃한 그리스에서 동일한 요리를 '돌마(dolma 또는 dolmadaki)' 또는 '돌마데스(dolmades)'라고 부르고 있어 세계적으로는 '돌마'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살마'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하련만, 터키인들도 이 요리를 '야프락 돌마(Yaprak dolma)'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접하는 이를 조금 헷갈리게 만든다. 크게 보면 '살마'도 보다 큰 범주인 '돌마'의 한 갈래라는 해석이 있다.


세비야에서 먹었던 포도잎 쌈, 살마(salma)







오늘 만들 요리는 피망과 토마토로 만든 돌마(biber dolma, domates dolma)이다. 레시피마다 재료가 조금씩 다르고 그 양도 자유자재인 것으로 미루어보아 평범한 가정요리임을 짐작할 수 있다.


[참고한 동영상]

Green Pepper Cappies Stuffed With Pepper Recipe

https://goo.gl/tQyLVj



[토마토와 피망 돌마 재료]

*재료는 정말 취향 껏이다. 고기가 넉넉하다면 쌀 대신 고기를 더 넣어도 되고, 마늘향을 좋아한다면 마늘을 훨씬 많이 넣어도 좋다. 다진 양파를 볶아서 넣는 레시피도 있으니 를 추가해보는 것도 추천한다.

*생각보다 향신료가 거의 들어가지 않는 것이 예상 밖이었다. 담백한 맛 그 자체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었지만 좀 더 진득한 맛을 원한다면 큐민, 코리앤더 시드, 파프리카 파우더 등을 추가하는 것도 좋다.


- 토마토: 단단하고 탱탱한 것으로 대여섯 개

- 피망: 단단한 것으로 대여섯 개

- 소고기 다짐육: 주머니 사정에 알맞게 준비

- 쌀 3인분 정도: 3시간 이상 불린 후 전자레인지에 15분 정도 돌려서 살짝 익힌다.

- 토마토 페이스트 또는 토마토 캔: 한 개

- 마늘 취향껏

- 말린 민트 약간

 - 소금, 후추



[토마토와 피망 돌마 조리법]

1. 토마토와 피망은 윗부분을 잘라 뚜껑을 만들고 숟가락으로 속을 파낸다.


잘 서 있지 못하고 자꾸 쓰러진다면 아랫부분을 구멍이 나지 않을 정도로 살짝 잘라서 바닥을 평평하게 만들도록 한다. 물론 사진처럼 꽉꽉 끼워 넣는다면 출근길 만원 지하철의 원리로 인해 스스로 잘 설 수 있게 되니 바닥을 다듬을 필요가 사라진다.



2. 불려서 살짝 익힌 쌀, 소고기, 토마토 페이스트(토마토 캔보다는 진하게 농축된 페이스트가 더 낫다), 다진 마늘, 민트, 소금, 후추를 고루 섞는다. 비율은 취향에 맞게 조절한다.

토마토 페이스트나 토마토 캔 내용물은 후반부를 위해 세 큰 술 이상 남겨놓는다.


3. 속을 비운 토마토와 피망에 (2)의 속재료를 집어넣는다. 쌀이 익으면서 부피가 커질 것을 고려해 너무 가득 담지 않는다.



4. (3)의 재료에 올리브유를 적당량 뿌린다. 토마토와 피망의 뚜껑을 덮는다. 팬 바닥에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높이로 물을 자작하게 붓는다.

약 1 시간 동안 오븐에 굽는 과정 중에 재료가 타버리지 않고 수분기를 유지하며 익도록 하는 과정이다.



5. 180도로 예열한 오븐에 40분간 익힌다.



6. (5)를 오븐에서 꺼낸다. 남겨두었던 토마토 페이스트를 물에 일대일로 희석하여(토마토 캔은 덩어리를 으깬 다음 그대로) 토마토와 피망 위에 뿌린다. 180도의 오븐에서 15~20분간 더 익힌다. 쌀이 다 익으면 완성이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토마토 돌마와 피망 돌마가 완성되었다!



알록달록한 색이 먹음직스럽다.



어떤 녀석을 먼저 먹을까?


향신료가 많이 들어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맛이 삼삼하다. 그 때문에, 오븐에서 노릇하게 익은 토마토와 피망의 향을 더욱 섬세하게 느낄 수 있었다. 특히 피망의 은은한 매운맛이 매력적이다. 새콤한 토마토 국물은 감칠맛을 잡는 역할을 한다. 흐릿하게 남은 민트향이 전체적인 맛의 조화를 해치지 않고 얌전히 향의 한 갈래를 더한다.



토마토든 피망이든 세 조각만 집어먹어도 배가 부르다. 남은 덩어리들은 모두 냉장고에 넣어두었는데, 요리를 만든 후 이틀 동안은 퇴근하는 길에 마음이 든든했다. 저녁 준비를 할 걱정 없이, 냉장고에서 올망졸망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귀여운 돌마를 꺼내먹으면 되었기 때문이다.


필시 가족을 위해 돌마를 준비하던 터키의 어머니들은 돌마를 켜켜이 쌓아두고 한껏 흡족함을 느꼈으리라. 마치 곰탕이나 카레를 잔뜩 끓여놓고 며칠간 반찬 걱정을 덜어버렸던 나의 어머니처럼.




속이 꽉꽉 찬 돌마를 바라보는 마음이 이토록 푸근한 것은 아마도 인류 공통의 감정이 아닐지.


다음은 또 무엇을 꽉꽉 채워볼까?



[참고한 사이트]

Wikipedia: Turkish cuisine

https://en.wikipedia.org/wiki/Turkish_cuisine#Dolma_and_sarma


Wikipedia: Dolma

https://en.wikipedia.org/wiki/Dolma


Wikipedia: Farcis

https://fr.wikipedia.org/wiki/Farcis


What do you think... is Dolma and Sarma the same thing?

https://answers.yahoo.com/question/index?qid=20091025132357AA5Vv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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