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들이야
<버닝>을 봤다.
(죄송합니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touch my body가 울려퍼진다. 지금 당장이라도 너를 눕히고 올라타고 싶다는 기세의 해미와, 고자라도 된 마냥 주눅들어 콘돔도 못 끼는 종수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했다. 말하자면... 이 시대의 청춘이란 걸 둘로 나누면.... 크게 성중독과 성불능 두 종류가 되는 걸까... 아무튼 <버닝>은 발정난 여자애와 고자 남자애의 만남으로 힘차게(호호) 시작하는 영화였다.
없는 것을 잊어버리면 된다는 궤변이나 그레이트 헝거 그딴 건 다 집어치우자. 그런 건 유의미한 은유도 아니다. 나는 아직 배고프다, 2002년 월드컵 때 히딩크가 그랬었나. 그래서 뭐? 도식적 은유로 관객들을 현혹시키고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아무 의미 없는 거 아시죠 외치는 건 <곡성>까지만 하자구...
아버지가 공무원을 때려서 잡혀가고 홀로 남은 파주 집에서 종수는 아버지의 흔적을 들여다본다. 그 때마다 어김없이 의미심장하고 신경질적인 음악이 따라붙는다. 아버지의 유산에 다가가고 물러서길 반복하던 종수는 결국 영화 말미에 아버지의 칼을 유사한 방식으로 사용함으로써 아비를 계승한다. 그런데 뭐... 다 떠나서 그 아버지가 mbc의 최승호 사장이란 건 참... (하하)
일말의 진실을 담은 한 장면이 있다. 영화에서 종수가 아버지의 탄원서를 받으러 이웃에 들렀을 때 "계세요?"라는 그의 물음에 이주여성으로 보이는 여성이 대답한다.
아무도 없어요. 무슨 일이에요?
아무도 없어요.
그녀는 여기 있어요 대신에 아무도 없어요 라고 말했다.
<버닝>은, 이창동은, 청춘을 말하지만 여기에 청춘은 아무도 없다. 도식화된 청춘. 후줄근한 셔츠를 입고 진실을 다 알지만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종수가 있고, 그레이트 헝거 어쩌고 하면서 아프리카로 떠나는 해미가 있다. 섹스에는 존나 관심도 없고 (종수는 들끓는 창작욕 때문에 어쩔 줄 모르는 바보...! 그레이트 헝거라서 섹스할 때도 남산타워 창문에 반사되어 들어오는 빛만 바라보지요...!) 자위밖에 할 줄 모르는 자폐적 청춘 종수가 있고, 노을 아래에서 벗고 춤추는... 자유로이 해방된 (ㅋㅋㅋㅋㅋㅋㅋㅋ) 영혼 해미가 있다. 그래서.. 이게 진짜야? 뭐 진짜라는 게 애초에 없다고는 하지만...
- 계세요?
- 아무도 없어요. 무슨 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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