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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평 Aug 10. 2021

물의 연대기

나는 떠다닌다

태어난다는 것에는 많은 의미가 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한 생을 벗어나 새로운 생을 살게 되는지. <물의 연대기> 58페이지, ‘구원’ 챕터의 첫 두 문장이다. 영화 <브루클린>을 보고 나서 집을 떠나온다는 것에서 쓴 적이 있다.(글 바로 읽기) 나는 대학 입학을 위해 집을 떠나며 새로 태어났다. 알던 것들을 떠났고, 버렸다. 시간이 걸렸고 어떤 것은 지금도 끌어안고 있지만 다시 태어났다는 수식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는 달라졌다.


밤이 되기 전부터 나뒹굴었다. 학교 앞 지하 카페에서 낮부터 칵테일을 시키고 담배를 뻑뻑 피워대는 여자들 틈에서 책을 읽었다. 담배는 피우지 않았고 술도 잘 마시지 않았지만 언제나 함께 있었다. 나는 아주 느리게 욕망했다. 여자들의 부드러움을, 니코틴의 강렬함과 알콜이 주는 느슨함을. 학생문화관의 숲은 서늘했고 학관 십자로는 다정했다. 나무 의자에 앉아 있으면 사람들이 오가며 말을 걸었고 행복했다. 읽는 것들마다 마음을 조금씩 긁었다. 따뜻한 밀크티를 후후 불어 마시다가 고개를 들면 키보다 열 배는 큰 나무들이 있었다. 학관의 어지러운 계단과 귀신이 나온다는 화장실, 갑자기 튀어나오는 통로와 거울이 좋았다. 여름에도 바람 부는 냄새가 났다. 니체와 데리다에 대해, 이름을 다 기억하지도 못할 철학자와 예술가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때, 완고한 목소리의 선생님에게 도와 리에 관해 들을 때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 여전히 기억한다. 가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서로를 할퀴었던 것도 기억한다. 선생님 앞에서 울던 것도, 얼굴도 가리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이 계단에서 저 계단으로 달리던 것도. 기억을 안고 나는 이제 다른 편으로 넘어와 다른 생을 산다. 예전보다 덜 울면서.


영영 이어질 것 같았던 쓸쓸함이, 바뀌지 않을 것 같았던 서늘함이 일순에 누그러지는 경험을 한다. 리디아 유크나비치의 문장에 머리를 기댈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한 생을 벗어나 새로운 생을 살게 되는지.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을 간절히 원하고, 위하고, 애틋하게 쓰다듬고 있는지 불현듯 깨달을 때마다 기쁜 동시에 두려워진다. 가끔은 좋아하는 이름을 소리내어 부르기만 해도 위험했던 기분이 나아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다시금 내가 위험에 처했음을 안다. 그러나 이미 다가와 있는 생을 피할 방도는 없다. 나는 욕망한다는 수치심을 누른다. 꼭꼭 씹어 삼킨다. 터키쉬 딜라이트보다 단 맛이 난다. 느리게 혀를 움직여 단 맛을 간직해보려 할수록 혀가 아리고, 나는 다시 두려워진다.

이전 05화 "아무도 없어요", <버닝>을 보고 빈정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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