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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평 Aug 10. 2021

즐거움에 관한 형용사 결핍

개짱이다 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언어의 빈곤함


안 좋은 이야기 할 땐 에이 포 스무 장이라도 써낼 기세이면서, 좋은 이야기를 할 때면 언제나 문장이 간결해진다. 좋다, 대박이다, 개짱이다 같은 단순한 어휘(이걸 어휘라고 할 수 있다면)들만 뇌 용량의 대부분을 메우고 있다. 빈곤하다. 그나마 '근사하다' 정도의 말쑥한 표현이 내가 쓸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좋은 말'인 것 같다.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올해의 남은 날들에는 조금 더 많이 읽고 보고 써야겠단 생각을 한다. 즐거움에 관한 형용사 결핍을 해소하겠다는 분명한 목표를 갖고. 무엇이 좋은지, 좋다면 어떻게 좋은지, 내가 정확히 어떤 감각을 느꼈는지 하는 것들 말이다. 내가 요즘 제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때 내가 어떤 기분인지 누가 물었을 때, "기분이 개짱이야. 진짜 대박이야."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멋이 없냐고...


그래서 나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d.를 마주하고 있으면 시간이 밀가루 반죽처럼 숭덩숭덩 떨어져 나가기라도 하는 것 같다. 여섯 시였다가 갑자기 아홉 시가 되고, 정신을 차리면 새벽 한 시가 되어 버린다. 우리는 하루가 사십 팔 시간이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며 웃고, 그 사이에 시계는 새벽 세 시를 가리키고야 만다. 무슨 이야기를 했더라? 첫 만남을 떠올리면 나는 그와 한 번의 끊김 없이 대화를 이어나갔고, 웃었고, 메뉴판에 있는 술의 이름으로 농담을 했고, 첫 대화라고 치기에는 깊고 넓은 '취향'을 주제로 이야기했다는 것 이외에는 기억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몇 주 동안 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서른 번쯤 참았다. 진은영의 시를 생각한다. 모리스 블랑쇼의 문장을 생각한다. d.는 수수께끼 같다. 블랑쇼의 말처럼, "수수께끼란 그쪽으로 끌린다는 것 이외에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기를 요구" 하니까. 아까운 게 없다. 시간도, 돈도, 체력도, 당신 원하는 만큼 가져다 쓰세요 하고 그의 손바닥 위에 얹어 주고 싶다. 커다란 가방이 있어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이야기와 느끼는 감정들을 다 집어넣어 보관할 수 있다면 좋겠다. 조금은 연한 내 눈동자와 조금은 진한 d.의 눈동자, 그걸 들여다보는 서로의 눈빛도 가방 앞 주머니에 넣어두었다가, 그리움이 코를 킁킁댈때마다 꺼내 보고 싶다. 결핍 없는 언어를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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