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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평 Aug 10. 2021

사랑 없는 팬클럽

떠나간 줄도 몰라 때늦은 작별 인사도


한 시절이 다해버렸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이 있다. 2013년이었던가, 대학 다닐 때 가장 친하게 지냈던 h.와 절교하던 때에 그랬다. 언제나 한 방에서 부대끼고, 하루의 많은 시간 아무렇지도 않게 통화하고, 뭐해, 라는 텍스트를 다 치지 않고 늘상 'ㅁㅎ'라는 카톡으로도 충분히 소통 가능했던 우리의 관계가 어느 순간 툭 끊어져버렸다는 걸 알게 되던 순간이 있었다. 그 순간을 정확히 형용하기는 힘든데 아마 우리가 함께 하고 있던 연극 연습 중간 즈음이었을 것이다. 배우 한 명이 한 대사를 짚으며, 그 부분 좀 천천히 해 주세요. 라고 내가 말했을 때, h.가 내 말을 반복하며 그래, 그 부분 좀 천천히 해. 라고 했을 때였던 것 같다. 


아니다. 연습 끝나고 맥주 마시러 가자고 했던 h.의 말에 전혀 동하지 않아, 난 집에 갈게 하고 혼자 집으로 돌아가 맥주를 마셨던 때였던 것 같다. 아니, 그것도 아니었나. 맡기로 했던 스태프 일을 못 하겠다고 문자했던 그날 밤, 내가 그에게 갖고 있던 애정이 메두사의 머리처럼 돌이킬 수 없는 형태로 굳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와의 작별은 내 일부를 떼어내는 일이기도 했다. 내가 싫어하는 나의 면모, 머뭇거리고 느슨한 면,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관대한 면, 게으른 면, 느린 면, 미루는 면, 약속에 늦는 면... 내가 나를 혐오하는 이유를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서 발견할 때 느껴지는 염증 같은 것. 그걸 더 이상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와 절교라는 걸 정말 본격적으로 하고 나서, 나는 여전히 내가 싫어하는 면면을 가지고 있지만 어느 정도는 그것들로부터 떠나온 것 같다. 적어도 그 이전보다는. 


그러니 어쩌면 절교라는 건 관계를 끊는 것인 동시에 어떤 성질을 끊어내는 것에 가까우리라. 


절대 안 끝날 거 같은 마음도 있다. 그런 마음도 시간과 사건에 얻어맞다보면, 어긋나는 타이밍의 귀퉁이에 툭툭 부딪치다 보면... 끝에 가까워 지기도 한다. 얼마 전에 가을방학의 '사랑 없는 팬클럽'을 듣다가 조금 서러운 마음이 됐다. 사그라들지 않을 것 같은 마음이, 사랑이 자꾸만 접었다 펴다 보니 어느 순간 옅어져 버린 걸 깨달았는데 그게 그렇게 무섭고 낯설었다. 사진 속의 모습은 여전히 아름다운데, 무언가 다르다는 걸 눈치채버린 거다. 하나도 안 지우고 있던 사진들을 지워나가면서 느낀 감정은 사랑보다는 애틋함이고 떨림과는 다른 종류의 소중함이라는 걸 알아버렸다.


"알고 있어 우리에게는 이젠 사랑이 없단 걸 예전 같지는 않단 걸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그대의 팬이야 어떤 별들은 처음 같은 떨림 없이도 반짝임을 세상에는 졸업장 없는 졸업이 있지 떠나간 줄도 몰라 때늦은 작별 인사도 수없이 접었던 맘을 펼쳐본 자국" (가을방학, '사랑 없는 팬클럽'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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