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 mei mi Aug 09. 2020

내 실패의 색(色)

- 나의 데님 로드 (My Denim Road) -










지구가 속한 은하계엔 태양이 있다. 이글거리는 태양 에너지가 지구에 내리쬐면 다양한 전자기파가

나온다. 그중에서 인간에게 보이는 유일한 빛은 가시광선. 이 빛의 파장으로 우리의 세상에 '색깔'이 

생겼다. '빨주노초파남보'로 대표되는 무지개색 스팩트럼(spectrum), 그 안엔 아직도 중첩된 빛의 

파장에서 형성된 수많은 색상이 존재한다. 




세상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색(色)으로 가득 차 있어 다채롭기 그지없다. 그런 색을 가진 사물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건 분명 축복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모든 것은 색채로 표현된다. 이

것은 햇빛이 만든 아름다운 빛의 발현이며, 조물주의 손길과도 같은 절대적인 미(美). 그래서인지 몰

라도 사람들은 고대부터 컬러에 대한 표현과 상징을 연구했는지 모른다. 색채학에서 밝히는 각 각의 

색이 가지는 의미를 통해 현재는 다양한 산업 분야에 적용시켜고 있다.



흔히 개성을 말할 때 '자신만의 색깔'이라 한다. 확연히 구별되는 고유한 특성을 눈에 보이는 빛깔로

나타낸다고 한다면 색상의 명칭은 그야말로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세분화된 산업의 발달과 미적 욕

망은 이제 일상생활에서도 본인에게 어울리는 색과 그렇지 못한 것을 분별해서 진단 하는 퍼스널 컬러

( personal color)가 대중화됐다. 이토록 색에 열망하는 존재가 인간 이외에 또 있을까? 아마도 끊임

없이 자아를 탐구하는 존재이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모든 것이 색으로 이루어진 이 세상에서 그렇다면 나의 색은 무엇일까? 늘 그것이 알고 싶었다. 

유년시절부터 함께 해온 내 오랜 지기(知己) 그림. 흙바닥, 담벼락, 장판 깔린 방바닥, 신문지, 

도화지를 가리지 않고 그리기를 참 좋아했다. 글자도 낙서처럼 적는 게 재밌었다. 대단한 작품

이 나오는 행위로 귀결되지 않았지만 그 자체가 행복이었다.



청소년기에 이르러 그림을 통해 장래의 일에 대한 꿈을 그리게 됐다. 중학생 때는 순정 만화에 

빠져 만화가를 지망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선 수채화를 배운 후 사양화를 그리는 화가가 되고 

싶었다. 일반적으로 화가가 되려면 먼저 미대에 입학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술대학 입시를 위

해선 미술학원에 다녀야 입시 요강에 맞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 집은 그럴 돈이 

없었다. 아버지의 반복되는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살집이 없어 친

척집에 신세를 지기도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고등학교 1학년이 즐거웠던 건 동아리로 가입한

 '미술부' 활동이 있어서였다. 이때 만난 미술 교과의 선생님께서는 미술부 관리 담당도 겸임하고 

계셨다. 선생님은  수업시간과 동아리 활동에서 보이는 내 그림에 대한 작은 재능을 언제나 크게 

치켜세우며 격려 해 주셨다.



은사님께서는 내가 미대 입시를 희망하지만 학원을 다닐 수 없는 경제적 여건을 아시고 주변의 인

맥을 수소문해 미술학원에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셨다. 두 달간은 무료로 수강했다. 이

후엔 학원 측의 배려로 일반 학생보다 적은 돈을 지불하고 학원을 다녔다. 하지만 학원은 자선단체

가 아닌 실적을 올려 돈을 버는 기업이다. 모든 돈을 다 내고 배우는 다른학생과의 형평성에도 어긋

났다. 나는 일반적 형태의 수강생과 학원을 그만두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 해야 했다. 그동안 학원에 

지불했던 적은 금액의 학원비도 겨우겨우 모아 지불한 내게 선택은 하나였다. 학원을 나왔다. 학원을 

다녔던 4개월을 지나 얼마후 고등학교 3학년으로 진학했다. 






미대 입시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다. 그걸 안 두 살 터울의 친오빠는 군대 가기 전 자신이 모은 돈 

70만 원을 내 손에 쥐여 줬다.


"이걸로 너 하고 싶은 거 해."


난  뒤도 안 돌아보고 그 돈을 미술학원 여름방학 특강비에 썼다. 고3 입시생 두 달간의 특강비는

200만 원이 넘는 금액을 현금 일시불로 내야 했다. 나는 수중의 70만 원어치만 수강하기로 하고 등

록했다. 금액만큼의 기간이 끝나자 학원에서 그렸던 그림의 도화지를 챙겨 나왔다. 서양화과를 지

망했던 내가 배웠던 그 당시 입시는 석고 정물 수채화. 2절지에 그린 그림이라 많이 무거웠다.둥글

게 말아서 가슴에 바치고 양손으로 감싸 걸었다. 그런데 부피와 무게를 못 견디고 얼마안가 길 바닥

에 그림을 쏟아 트렸다. 학원 안에서도 안 흘렸던 눈물이 그때 나왔다.      







수능 시험  성적이 발표되고 얼마 후 서울의 모 여대 서양학과에 합격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여름

방학 특강 기간에 2학기 수시 입시를 본 적이 있었다. 시험을 봤다는 것조차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1차 내신점수, 2차 실기시험 그리고 3차 수능성적 이 세 가지를 합산하여 나온 결과였다. 정해진 날

짜까지 일정 금액을 지불하지 않으면 합격이 취소된다고 했다. 그러나 그 돈을 지불해도 나머지 등

록금을 낼 여력이 없었다. 얼마 전 군대에 간 오빠, 사업 실패로 무기력에 빠져 일을 하지 않는 아버

지를 대신해 내가 집안의 가장이 되어야 했다. 만일 그때 지금처럼 한국장학재단이 있어 학자금 대

출을 받을 수 있었다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까?라는 생각이 든 적도 있다. 4년제 미대이니 학자금 대

출은 많이 쌓여도 누구나 아는 학교를 나왔다는 타이틀은 남지 않았을까라는... 그런 바보 같은 생각

을 한때 했었다. 지금의 나였다면 오빠가 주었던 70만 원을 결코 학원비에 쓰지 않았을 것이다. 현재

의 시선으로 생각해 보면 그건 전 재산을 들고 사행성 도박에 배팅을 한 것과 다름 없었다.






미대 진학을 포기한 그 시점부터 나는 형체 없는 희망을 더 이상 떠올리지 않았다.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바빴다. 어렸을 적 꾸웠던 꿈같은 건 다 허상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내 손은 그림

그리기를 몸으로 기억했다. 가끔 그림을 그렸다. 수채화 물감이 잘 짜인 팔레트 안은 채도 높은 화

려한 색상이 즐비하다. 그걸 물에 개어 도화지에 바르면서도 정작 내 안에서 느껴지는 색이 없었다.

포기에 순응 하는 삶이  자신의 색을 알아가는 시기에 맞물려 그 빛깔을 알 수 없게 막았다. 내게 오

는 희망이라는 가시광선을 없애 버렸다. 차단된 빛, 내 안은 안개처럼 자욱한 그림자만 드리워져 있

었다. 그렇게 10년이 넘는 세월을 집안의 가장으로 살았다. 여러 해가 지나 30대 초반에 뒤늦게 들

어간 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취업한 곳에서 데님을 만났다.




광부를 위한 작업복으로 세상에 처음 태어난 청바지. 그것을 만드는 데님 원단은 인디고(indigo)

염료로 짙은 푸른빛을 띠고 있다. 다른 옷과 확연히 구별되는 특별한 공정 워싱(washing)을 하게 

되는데, 물과 화학 염료를 사용하여 푸른 색채를 다양하게 표현한다. 여기에 청바지 표면을 찢고 

갈아낸다. 원단은 해지고 닳아서 경사와 위사 한 올 한 올이 나부낀다. 정형화된 모습이 아니다. 

그래서 한 없이 자유로운 모습과 색(色)으로 표현될 수 있는 개체가 된다. 나는 이 매혹적인 모습

에 단숨에 매료됐다. 그것은 불투명한 내 미래에 색과 형태를 갖춰 나타난 희망이었다. 선명히 빛

나는 유일한 색채였다. 운명이라 생각했고 데님 디자이너는 곧 내 꿈이 되었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시작한 데님 디자이너의 길은 녹록지 않았다. 어렵게 들어간 직장에서는 

약속한 월급을 주지 않았다. 추후에 돈을 조금 돌려주거나 아예 떼어 가는 곳도 있었다. 좀 더 

다양한 기회를 갖고자 동대문 시장으로 갔다. 시장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과도 같아서 종 잡을 

수 없었다. 살면서 경험해 보지 못한 안 좋은 일을 많이 겪었다. 나는 인격의 전시장인 시장의 

민낯을 보았다. 생애 최초의 해고와 권고사직을 겪었고, 뉴스에서만 보던 직장 내 괴롭힘의 피

해자가 되었으며 업무 중 상해를 입어 척추수술을 하게 되었다. 몸과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계

속되는 인생의 불행 앞에 내가 굴복했다.







오랜 투병과 수술을 지나 1년이라는 시간을 아무것도 못하고 흘려보냈다. 사람이 싫었고 두려웠다.

포기가 익숙한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바랬던 욕망, '하나의 색'이 좌절된 순간 모든 것이 멈췄다. 끝

났다. 이제는 인생을 하직하는 순간에 도래했다고 느꼈다. 그전에 한 번만 스스로에게 문을 만들어

주기로 했다.



어려서부터 내가 세상과 소통하던 창(窓). 그림 그리기와 글쓰기였다. 이후에 어떻게 되더라도 상처

입은 마음을 풀 기회를 한 번은 줘야 했다.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블로그에 100일 동안 연재하는 미션

을 시작했다. 제목은 나의 데님 로드(My Denim Road). 무엇하나 내세울 것 없는 실패 뿐인 삶에서 

도대체 '왜 나는 데님을 그토록 좋아했을까?' 그 물음에 대한 응답을 찾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그림

을 그리고 글을 적어 나갔다. 데님 디자이너가 되기 이전부터 데님과 함께 했던 순간들을 반추했다. 

신기 하게도 조금씩 삶의 기운이 나기 시작했다. 더불어 악의적인 억압으로 짓눌린 내 속의 말을 되

살려냈다. 내 글을 적어가며 동시에 책 속의 타인의 글을 소리 내어 읽었다. 타인의 말이 나를 죽였고 

타인의 글이 나를 살렸다. 내 영혼에 박힌 파편의 말을 소리 가진 글이 들어와 몸 밖으로 밀어냈다. 조

금씩 스스로가 회복되고 있음을 알게 됐다. 그림과 글쓰기가 '나'다움의 불씨를 지폈다. 그 일련의 과

정 속에 진정한 내가 살고 있었다. 나를 지키는 힘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작가 무라카미 류에게 청춘의 방황과 삶의 모습이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였다면 내 삶을 

통틀어 낸 색은 청바지의 짙고 푸른 인디고 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내가 사랑한 완전한 꿈이

자 실패의 색이다.











이전 15화 새로운 시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