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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탓에도 유통 기한이 있다

by 선향

'해리 포터'의 작가 조앤 롤링이 하버드대학 졸업 축사에서 농담하듯 던진 말이 있다.


"자신의 인생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게 되었다고 부모를 탓하는 데에는 유통 기한이 있다는 거, 여러분 아시죠?"


가난한 노동자였던 조앤 롤링의 부모님은 딸이 취업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전공을 선택하기를 원했지만 그녀는 고전문학을 선택했다. 그리고 해리 포터 시리즈가 성공하기 전까지 실패를 두려워하며 가난에 시달렸다. 시골에서 힘들게 농사를 지으면서도 아무런 반대 없이 막내딸을 서울로 유학 보내 주시고, 그리고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스웨덴어를 전공으로 선택하도록 내버려 두시고 지원해주신 우리 부모님께 감사드린다.

우리는 몇 살까지 부모를 탓할 수 있는 것일까? 어릴 적 충분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커서 내가 충분하지 못한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고 썼지만 이 말을 들으면 우리 엄마, 그리고 오래 전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께서 뒷목을 잡고 섭섭해 하실 듯하다. 오남매를 키우며 아낌없이 다 내어주신 분들이기 때문이다.

부모 탓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는 조앤 롤링의 말을 무심코 전했더니 남편에게서 격한 반응이 나온다.

"내가 엄마 탓하는 거라고? 절대 아니야."


많은 아들과 엄마 사이는 참 오묘하고 복잡하다. 남편과 시어머니 사이도 그렇고 우리 오빠와 엄마 사이에도 애정과 미움, 감사와 분노, 책임과 부담감 등 복합적인 감정들이 뒤얽혀 있다. 어머니는 아버님과 결혼한 지 사년 만인 스물여섯에 과부가 되셨다. 두 살 된 내 남편과 뱃속 유복자인 시동생을 남기고 갑작스럽게 아버님이 목욕탕에서 쓰러져 돌아가신 것이다. 그 후 그 분이 사신 세월의 신산함은 다큐멘터리 하나 분량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직장을 다니는 동안 아이들을 키우고 살림을 해주신 어머니는 내게는 큰 은혜를 베푼 분이시다. 스물여섯에 과부가 되고나니 바닥에 납작 엎드린 풀처럼 평생 모든 것을 위로 쳐다보는 수밖에 없었다고 하셨다. 어디에 가시든 인심 좋고, 말 많고, 호탕하며, 어울리기 좋은 사람으로 사신 비결일 것이다.


남편은 어머니에 대한 원망을 가슴 깊이 구겨 넣고 살다가 마흔 중반쯤이 되어 크게 터트렸다. 이십여 년을 같이 살다가 칠순을 훌쩍 넘기신 어머니와 따로 살게 된 이유이다. 어린 시절 쌓인 원망이 아직 가슴에 남아있는 듯하다. 어린 시절 줄곧 '가족이 굴레'처럼 느껴진 그 원망이 여전히 소진되지 않았는지 아직도 어머니에 대한 복합적인 애증을 표현하곤 한다.


부모의 책임도 무한히 베풀던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 내 인생에도 나를 키워준 부모와 내가 자란 환경에 대해 책임을 돌리며 탓을 하는 것을 멈춰야 할 시점이 있다. 내 삶의 모든 것은 온전히 나의 선택이었고 나의 책임이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이다. 내 삶의 순간순간은 온전히 나의 선택으로 주어져 있다.

아카시아


양어깨로 하늘을 받든 전설의 거인처럼

오랜 세월 굳건했던 그 분의 어깨 위에

우리는 너무 오래, 너무 깊이 뿌리를 내린 아카시아 나무


무덤 속, 관을 뚫고 뿌리를 내린다는

아카시아의 눈 먼 성장

그분의 피와 살을 한해 한해 빨아먹고

꽃피우고 키 자란 우릴 싣고

뼈와 힘줄로 허적허적 걸어가시는 그분


휘청 이는 발길 아랑곳없이

땅 끝에 닿을 때까지 온몸을 꿰뚫는 아카시아 뿌리

못 박혀 더 이상 걷지 못하고 서서

상한 눈길 드시는 그분,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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