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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겨낼 수 있는 힘과 살아가는 기쁨

by 선향

중학생 자녀를 둔 직장 동료가 물어온다.

"스트레스를 어떻게 해소해요?"

그녀는 지난 주말 친구 둘과 함께 밤을 새워 소주 한 박스를 마셨다고 한다. 그녀의 친구 한 명은 최근 직장을 그만 두고 중학생인 딸을 데리고 호주로 가서 일자리를 알아볼 예정이라고 한다. 또다른 친구도 회사의 압박을 견디다 못해 사직서를 제출하고 일자리를 찾고 있다고 했다. 과연 이 스트레스들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문제없이 즐겁고 행복하기만 한 중년은 어디에도 없다. 가족의 생계에 대한 부담, 노년에 이른 부모의 거취와 병환, 사춘기 혹은 대학생이 된 자녀의 교육 문제, 매일 매일 퇴직을 고민하게 만드는 힘겹기만 한 사내정치와 업무 압박, 정치혼란과 사익추구가 극대화된 사회 분위기, 거기에다 삐걱거리기 시작하는 건강까지 중년의 문젯거리들은 중층으로 쌓여 무겁기만 하다.


중년의 직장인에게는 조직을 떠나는 것이 큰 두려움이다.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절박함도 있지만 그 문제가 해결되어도 조직을 떠났을 때 무엇을 하며 일상을 보내야 할지 막막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적인 소속감과 지위가 사라진 상태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오랜 대기업 근무 후 자신의 것으로 내세울 만한 것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고 느끼는 한 선배는 30년 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느 분야에서 일하던 자신만의 ‘포트폴리오가 있는 삶’을 살고 싶다고 한다. 감독과 영화배우에게는 필모그래피가 있다. 작가에게는 책이 남고, 화가에게는 그림이, 건축 설계사에게는 건물이, 학자에게는 논문이 남는다. 모델에게는 패션쇼와 화보가, 카피라이터에게는 카피가 남는다. 하지만 직장인에게는 내가 사라지고 직장만이 남게 된다.


스스로 자신의 전문성과 브랜드를 만들어가는 창조적인 작업 활동이 있는 삶이 선배가 말하는 ‘포트폴리오가 있는 삶’일 것이다. 내 삶에는 포트폴리오가 있을까? 지금까지 내 인생에 내세울만한 포트폴리오가 없다면 앞으로 어떤 분야에서 어떻게 포트폴리오를 쌓으면 될까? 지금부터 포트폴리오를 쌓는다면 내가 좋아하는 것들 속에서 찾아야하지 않을까?


예전에 TV에서 본 어떤 남자는 도마에 열심히 생선을 새기곤 했다. 돌을 쌓아 성과 같은 정원을 만드는 사람도 있었다. 운동을 열심히 하는 이도 많다. 친구 하나는 열심히 교회에 다니며 '이겨낼 수 있는 힘과 살아가는 기쁨 주시고 주변 사람들 또한 축복해 주시도록' 기도하며 힘을 얻는다고 한다.


우리 모두는 이겨낼 수 있는 힘과 살아가는 기쁨이 필요하다. 가슴에 다가오는 울림 있는 글귀를 읽는 기쁨, 가족들을 포근히 안아 다독다독 등을 두드려 주는 기쁨, 눈물이 핑 도는 감동적이고 벅찬 소식을 듣는 기쁨, 직장 동료들과 함께 일하며 고난과 성과와 보람을 같이 나누는 기쁨, 맛난 음식을 함께, 혹은 홀로 음미하는 기쁨, 감미로운 음악에 홀려 잠시 나를 잊는 기쁨, 재미있는 영화를 보거나 온라인에 연재되는 흥미진진한 소설이나 만화를 기다려서 읽는 기쁨, 좋은 친구와 함께 속 시원하게 세상사를 흉보는 기쁨. 해 뜨고 해 지는 것을 바라보는 황홀한 기쁨. 홀로 비오는 산길을 걷는 기쁨.


마음이 고여 있지 않고 흐른다면 이 혼란스런 삶 속에서 살아가는 기쁨은 여기저기 널려 있다. 더 많이 일상에 감사하고, 내게 주어진 삶의 기쁨들에 감사하고, 이 의식 진화와 변혁의 시기를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드린다. 가을이 제법 익은 10월의 어느 비오는 날 산속을 걷는 순간처럼 치유와 결심은 서서히 마음속으로 스며든다.


아무 생각 없이 우산 속에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축축하게 젖어있는 숲길을 걸어갈 때 머리 속 생각이 서서히 사라지고, 그저 온전히 존재했다. 그저 '좋다'라고 느끼며 산길을 걸었는데 돌아보니 그게 어마어마한 '힐링', 내게 필요한 치료제였던 모양이다.


시들어가고 저물어가는 빛바랜 낙엽들을 보며 시들고 빛바래져 가는 것들 속에서 오롯이 존재하는 무언가를 느낀다. 그 존재는 여전히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태양처럼 불타오르지 않고 아침 햇살에 빛나는 이슬처럼 영롱하게 빛나지 않는다. 노을빛을 받아 부드럽고 따스하게 빛나며 향기를 품은 들국화처럼 서서히 어둠 속으로 잠기며 그렇게 은은하게 빛난다.


딸들이 차려 준 생일상에 내놓은 케이크에 '엄마의 청춘은 바로 지금'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내가 좋아하는 연둣빛 바탕에 꽃분홍의 벚꽃 화관을 두른 너무도 예쁜 케이크. 엄마의 글쓰기를 격려하는 딸들의 마음이 너무도 고맙고 감사하다. 딸들의 응원대로 청춘이 꽃 피는 '바로 지금'을 살아야겠다.


도마에 생선 새기는 남자

횟집 생활 이십 년에 그렇게 생생한 건 처음 봤어야~


TV속 그 남자는 도마에 생선 새기는 남자라고 소개되었다

아들, 아버지, 남편, 가장, 세상과 세월이 준 어떤 이름도 어울리지 않던 그 남자는

도마에 생선 새기는 남자, 그 이름에 비로소 편안하였다

그 생선 참 맛있겠다야~

살 저미고 뼈만 남아 눈 끔뻑이는 생선 마냥 병실에 누운 노모에게

그는 펄떡이는 생명, 빛나는 비늘, 윤기 싱싱한 도마 위의 생선을 배달하였다


일렁이는 빛그림자 바닷 속을 유영하며

그는 오래 전에 자신을 방생하였다

도마 위에 칼질 당하기 싫은 자신을 위해

도마에 생선 새기는 남자, 그 이름 하나를 만들어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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