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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재 Feb 27. 2022

어느 산골 소녀의 사랑 이야기

[Cloud Mania] 스토리가 있는 구름 감상

[스토리가 있는 구름 감상] 어느 산골 소녀의 사랑 이야기

https://youtu.be/hdlV4DU5Ccg

구름 영상 제목: 어떤 사랑이야기, 촬영 장소: 포르투갈 알가브


산골 소녀


내가 사는 곳은 이른 아침이면 햇빛을 받은 눈 덮인 지리산 꼭대기가 세상에서 제일 먼저 보이는 작은 마을이다. 산 쪽으로 나지막한 언덕을 깎아서 집을 올리고, 부지런한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산 쪽을 계속 깎아 들어가서 지금은 제법 넓은 밭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 집은 3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깎인 산 쪽 둔덕이 우리 집 담이 되었다. 담의 역할은 집으로 들어오는 외부인의 침입을 어렵게 하는 것이 목적인데, 이 둔덕 담은 오히려 우리가 집에서 나가는 것이 어렵고 외부에서 들어오기가 더 쉬운 구조였다. 실제로 첩첩산중 산골에서 침입할 외부인도 없었고, 집에서 보면 둔덕이 산으로 이어져 우리에게는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었다. 일반적인 주택의 담도 도둑이 못 넘을 정도가 아니지만 담이 있어 우리 마음이 편하듯이.


나는 걸어서 한 시간 반쯤 걸리는 초등학교에 다닌다. 3년째 다니고 있는데 문제는 없다. 아니, 무엇이 문제인지 모른다. 다만, 추운 겨울은 걸어가려면 손과 귀가 많이 시리다. 하지만, 30분쯤 걷다 보면 귀는 감각이 없어지지만 몸에서 모락모락 김이 나서 추운 줄 모른다. 그런데, 여름에 비가 많이 올 때가 제일 싫다. 특히, 아침에는 맑았는데, 집에 돌아올 때 비가 오면 준비도 없이 비를 홀딱 맞아야 해서 정말 싫다. 밤부터 비가 많이 오면 이장님께서 집집마다 달린 스피커를 통해서 "에, 오늘 비가 많이 와서 학생들이 등교를 하지 않기로 하였으니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라고 알려 주신다. 하루 종일 비가 오면 학교에 안 가고 방에서 뒹굴거려서 좋은데, 오후에 해가 나면 밭으로 가서 일을 해야 해서 학교에 가는 것이 나았겠다고 싶을 때도 있다.


도시에서 온 소년


공무원인 아버지의 인사이동으로 지리산에서 가장 가까운 면 소재지로 이사를 왔다. 그 당시 아이들에게는 도시와 시골은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골목길에서 놀다가 자동차가 지나갈 때마다 비켜주지 않아도 되고, 양지바른 어느 집 대문 앞 계단에서 놀다가 쫓겨나지 않아서 좋았다. 여름이면 동네 앞을 흐르는 강에서 놀았고, 겨울이 되면 뒷산으로 뛰어다녔다. 도시에서 온 소년은 모든 것이 새롭고 좋았다.


소년의 어머니는 이삿짐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살펴보니 도시에서는 집에서 노닥거리던 아들이 들로 산으로 싸돌아 다니는 것이 신경이 쓰였다.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이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어느 일요일에 아침을 먹고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나가던 아들을 불렀다. "너, 요새 책이라고는 통 안보는 것 같던데, 오늘은 공부 좀 해라." 꼼작 없이 잡힌 아들은 방 가운데 책을 펼쳐 놓고, 두 주먹으로 턱을 괸 채 길게 엎드려 누웠다. 한 시간쯤 엎드려 있었지만 한 시간째 똑같은 페이지였다. 


답 아는 사람


분교 개설 조건이 되지 않은 작은 인근 마을이 많았던 까닭에 면 소재지 학교는 학년당 4 학급 규모로 제법 학교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도시로 전학을 나가는 학생들은 종종 있었지만 도시에서 전학을 오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도시에서는 평범했던 소년은 '아이들이 가 보지 못한' 도시의 후광으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시골에서는 당연한 것을 처음 본다며 신기해하는 소년에 신기해했다. 다큐멘터리에서 우리나라에는 바나나 나무가 없다는 대답에 '아니 그럼 대체 무엇을 먹고 사느냐'며 안 됐다는 표정을 지으며 놀라는 벌거벗은 아마존 원주민처럼.


배정받은 3학년 학급의 담임 선생님은 무서웠다. 군대보다 더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했으며, 일체의 예외도 허락되지 않았다. 간혹 혼나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불쌍해 보였지만, 타인의 고통을 공감할 틈도 없이, 누군가 대상이 되어야 한다면 내가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스스로를 위로할 지경이었다. 나에게 공포에 대한 면역력은 그때 길러졌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전학 간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의 산수 시간이었다. 단원 마지막 페이지의 연습 문제를 풀다가 어떤 문제에서 갑자기 "답을 아는 사람?"이라고 선생님께서 질문하셨다. 교실은 정적이 흘렀고,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으며, 침도 삼키지 못했다. 다시, "답 아는 사람 없어?"라고 물었다. 선생님의 주의를 끌지 않도록 '오징어 게임'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게임처럼 모두들 손가락 하나도 꼼작하지 않았다. 다만, 속으로 '제발 누가 대답 좀 해라'라는 주문과 소원을 빌며. 나도 앞에 앉은 아이의 그림자 뒤에서 선생님이 발견하지 못하도록 적당한 각도를 세밀하게 조절해 가며 자발적인 마비상태로 있었다. 똑같은 주문을 외며.


죽기 아니면 까무러 치기


선생님은 화를 내시기 시작했다. "앞에서 다 배운 내용인데 어떻게 한 사람도 아는 사람이 없어. 응?" 목청을 높이고 훈화와 질책이 계속되었다. '이 순간에 걸리면 죽는다'는 것을 아이들 모두 본능적으로 알았다. 하지만, 헤쳐나갈 방법이 없었고, 다만, 숨죽이며 '이 또한 지나가기를' 기도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사실 나는 답을 알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답만 알고 있었다.


그날 산수 시간 이전으로 기억을 되감으면, 정확히는 밖으로 도망하는 아들을 잡아 앉혀서 공부를 시킨 날이다. 할 수 없이 나는 방바닥에 배를 깔고 턱을 괜 채 '3학년 표준 전과'를 펼쳐 놓았다. 한 시간째 같은 페이지를 펼쳐 놓고 있었다. 책은 펼쳐 놓고 내내 엉뚱한 생각만 하고 있었다. 간혹 어머니께서 아들이 공부하고 있나 슬쩍 살펴볼 때면, 초점 없이 풀어놓고 있던 눈을 재빨리 내려서 책을 보는 척해야 했다. 눈동자만 내리면 되는 딱 그 눈앞에 인쇄되어 있던 굵은 글자가 '(정답) 20'이었다. 한 시간 내내, 수시로, 의미 없는 숫자 '20'만 보고 있었다.


선생님께서 "이 번 단원 내내 가르친 것인데 아무도 모르면 수업을 할 필요가 없다!"는 선언을 할 무렵 나는 고민을 했다. '아무도' 모르지만 않으면 선생님께서 떨고 있는 불쌍한 우리를 용서하시고 희망의 나라로 인도하실 것인가 고민했다. 그런데, 문제는 답을 알 뿐 어떻게 푸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답을 말했을 때, "그럼 어떻게 풀었는지 말해봐."라고 하면 낭패였다. 선생님께서 반 전체에 불만이 있을 때 시행하던 형벌이 단체 기합이었다. 운동장에 모두 모인 뒤에 오리걸음을 하거나 토끼뜀을 하는 것이다. 선생님의 감정 상태와 잔소리의 진행 상태로 보아 단체 기합의 직전 단계임이 틀림이 없었다. 에라, 죽기 아니면 까무러 치기다.


손을 들었다. 선생님이 돌아보셨다. 일어섰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20입니다." "왜, 진작 답을 안 했어?" 나는 고개를 숙여서 대답을 회피하였다. 속으로는 "제발 묻지 마라. 어떻게 푸는지 묻지 마라." 나의 주문이 통했는지 "앉아"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전학 온 아이도 아는데 너희들은 왜 모르냐"며 남은 시간 내내 잔소리를 퍼부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운동장에 집합하지 않았고, 종이치고 우리는 해방의 기쁨을 맞이하게 되었다. 도시에서 전학 온 화려한 나의 배경과 더불어 수학 능력의 탁월함을 각인시키는 훌륭한 데뷔 무대였다. 세월이 흐른 뒤에 에피소드를 들은 모친의 평가는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하면 자다가 떡을 얻어먹는다"였다. 그런데, 나는 떡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좌석 배치


담임 선생님께서 선언하셨다. 오늘부터 좌석 배치를 다시 한다. 한 달 동안 이렇게 앉는다. 키 순서대로 세워 놓고 4개로 나뉘어 있던 분단에 A1, A2, A3, A4, B4, B3, B2, B1의 형식으로 배치하거나, 번호 순서대로 쭉 앉히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날은 어떻게 배치되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남녀 합반인 관계로 왼쪽은 여학생이 오른쪽은 남학생이 앉았다. 나는 전학을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친하고 친하지 않은 아이들이 없었기 때문에 상관이 없었다.


산골 소녀와 도시 소년


이 정도 제목이면, 한국에서 정규 교육을 받은 분들은 무조건 반사로 황순원 작가의 '소나기'와 소년 소녀의 순박한 첫사랑을 떠 올릴 것이다. 음악을 즐기는 분들은 '노을빛 냇물 위엔 예쁜 꽃모자 떠가는 어느 작은 산골 소년의 슬픈 사랑 얘기'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아쉽게도 그런 로맨틱하고 영원한 노스탤지어 손수건 같은 이야기는 없다. 산골 소녀와 도시 소년은 짝이 된 한 달 내내 싸웠다. 결국은 감정싸움으로 끝났지만, 항상 출발은 산골 소녀가 시비를 걸었다. 예를 들면, 국어 시간에 선생님께서 '몇 페이지부터 몇 페이지까지 읽어라'라고 해서 국어책을 읽다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시비를 걸었다. "너, 전부 안 읽고 페이지 넘겼지? 다 안 읽고 넘겼다고 선생님께 일러 줄 거야." '선생님께 일러 준다'는 말은 저승사자의 명부에 이름을 올리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목숨을 위협하는 행위다. 그래서, 나는 강하게 항변했다. "다 읽었어." 소녀가 몰아쳤다. "내가 봤는데, 다 안 읽던데." 나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내가 다 읽었다는데 네가 어떻게 알아." 소녀는 집요했다. "내가 딱 보고 있었는데 분명히 다 안 읽었어." 나는 눈이 뒤집어졌다. "나는 다 읽었으니까. 선생님께 일러 주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 선생님께 일러 줄 거라고 협박을 하던 산골 소녀는 선생님께 일러 주지 않았다.


감정교육


텔레비전도 없었고, 라디오도 없었고, 소설책은 고사하고 동화책도 읽은 적이 없었기에 다른 사람의 감정에 대해 간접 경험이라도 하거나 학습을 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나의 타인에 대한 감정 해석과 처리 능력은 동굴 속에서 거주하던 원시인과 동일했다. 여자 아이가 나에게 시비를 거는 이유에 다른 이유가 있는지, 시비를 거는 심리적 기저에 어떤 다른 감정적인 요인이 감추어져 있는 것은 아닌지 이해하고 해석할 수가 없었다. 


시비를 걸면 보이는 그대로 시비를 거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나는 짝이 되었던 한 달 내내 산골 소녀를 싫어했다. 나중에는 소녀의 도발에 대꾸도 안 하고 눈길도 주지 않았다. 차츰 시비를 거는 강도가 약해지고 무언가 주저하는 듯 보였을 때, 나의 무대응과 회피 전략이 먹혀든다고 생각하고 의기양양해져서 더 심하게 무시했다. 이 바보! 심지어 나는 나쁜 남자였다. 산골 소녀가 내가 도시에서 가져온 신기한 학용품에 관심을 갖고 보여 주기를 원했을 때, 미워서 안 된다며 절대로 보여주지 않았다.


우리를 스치는 짧은 인연들에게


인간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 사회 문화적인 노출이 없었고, 타인의 감정은 고사하고 자신의 감정도 이해할 수 없었던 우리 어린 시절이었다. 자연스럽게 싹튼 감정의 매듭을 풀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고, 그래서, 현실판 '우리 산골 소년 소녀의 사랑 이야기'는 황순원의 소설이나 예민의 노래처럼 애틋하거나 야릇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이상하게 신경이 쓰이는 그 아이가 놀고 있던 고무줄을 끊고 도망가거나, 괜한 트집을 잡아서 사이가 더 어색해지고 틀어지는 수준이었을 뿐이었다.


그때가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시간인 줄 알았다면


한 달 동안 짝이 된 시간이 우리 인생에서 공유할 수 있었던 유일한 시간인 줄 알았다면, 좀 더 친절하게 대할 걸 그랬다. 그 애가 몽당연필에 흔적만 남은 지우개로 지우다가 공책이 찢어질 때, 여유로 가지고 다니던 사각 지우개를 하나 줄 걸 그랬다. 비가 와서 지각을 했던 날, 흠뻑 젖은 모습을 쳐다보고 있는 아이들의 눈초리에 당황해하며 비에 젖어 잘 풀리지 않는 책 보따리를 낑낑대며 풀 때, 손이라도 뻗어 도와줄 걸 그랬다.


지금 우리를 스쳐가는 사람들


지금 우리 주변에 스쳐가는 사람들이 우리 인생에서 만나는 유일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https://www.youtube.com/watch?v=PT9s8BiTXw4

예민, 어느 산골 소년의 사랑 이야기



https://www.youtube.com/channel/UCETF0QpWUjGuNrTQWtosxx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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