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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재 Mar 27. 2022

굵고 짧게, 또는, 가늘고 길게 살기

[ 클라우드 마니아 ] 스토리가 있는 구름 감상

[스토리가 있는 구름 감상] 굵고 짧게, 또는, 가늘고 길게

https://youtu.be/dr0R4zNyGQw

구름 영상 제목: '단지 형태와 길이의 차이일 뿐', 촬영 장소: 포르투갈 알가브


굵고 짧게


나는 영웅들의 이야기와 위인전기를 읽고 자랐다. 책에 감화 감동을 받은 내 삶의 궁극적인 가치는 세계 평화나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이 한 목숨을 바치는 것이었다. 간혹 백수를 누리며 장수한 위인들이 있기는 하였지만, 대부분 영웅이 되고 위인이 되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젊은 나이에 죽을수록 안타까움은 더 크고, 국가와 민족을 위한 그들의 희생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그래서, 세계 평화나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젊은 나이에 죽는 위대한 인물이 되는 굵고 짧은 삶을 꿈꾸었다.


장수보다는 단명이 영웅과 위인으로 남기 위한 필수 조건인지도 모른다. 자각 증세가 없는 자연스러운 노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사리분별이 희미해지고, 시대와 상황에 어긋나는 언행으로 이전의 존경을 상실하고 명성에 먹칠을 하는 각계 원로들의 슬픈 말로를 목격하면 영웅과 위인이 일찍 세상을 떠난 이유를 알듯하다.


초등학생에게 조차도 닥치고 무조건 외울 때까지 집에 보내 주지 않았던 대통령의 '국민교육헌장'을 따라, 나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으며', '인류 공영에 이바지하는', '새 역사를 창조하기' 위해서 살기를 소망했다. 따라서, '굵고 짧게' 이 한 몸 바치는 것이 삶의 목표였다. 나와 같이 성장한 새나라의 어린이는 모두 그런 가치관을 주입받고 자랐다. 예외 없이.


가늘고 길게


늦은 나이에 박사 과정을 하겠다고 무리하게 가족을 이끌고 유학을 떠날 때도 어린 시절에 주입받은 가치관을 벗어나지 못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예상되는 상황 속에서도 추진했던 심리의 기저에는, 작게는 '남편과 아빠의 발전은 가족의 발전의 원동력'임을 국민교육헌장과 같이 선언하고, 크게는 '인류 공영에 이바지하는 새 역사를 창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오랜 외국 생활을 통해서 한국 사회와 철저히 단절되지 않았다면, 나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국민교육헌장으로 주입받았던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나의 삶의 길이며, 자유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임을 진리로 선언하며 광장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있을 것이다.


대부분 은퇴한 노부부들이 살고 있는 교외에 살게 되었을 때, 넘겨다 보던 영국 노인들의 삶이 참으로 답답했었다. 불안정한 사회에서 무수한 경쟁을 이겨내며 치열하게 새로운 길을 개척하며 살아온 나로서는, 안정된 사회에서 주어지는 대로, 열려있는 길대로 살다가, 어느덧 나이가 되어 은퇴하고 뒤뜰에서 신문을 보고 있는 노인들의 인생이 답답하고 무료해 보였다. 


'굵고 짧게 살다 가자'라는 인생관을 쉽게 버리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이웃한 노인들의 삶을 지켜보고 교류하면서 차츰 '가늘고 길게' 살아가는 인생도 의미가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동시에, 세계 평화와 인류 공영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엄청난 사명을 어느 누구도 나에게 강요하지 않았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마치 그렇게 해야 되는 것처럼 세뇌당하고 훈련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내가 실제로 그렇게 큰 대의명분을 짊어지고 갈만한 인물도 아님을 알게 되었다.


위인 전기로 남은 짧고 굵은 삶도 의미가 있지만, 이름 없는 소시민으로 가늘고 길게 잔잔하게 살아가는 것에도 인생의 의미가 있다는 인식을 갖기 시작했다.


굵고 길게


지인이 지적했다.


"그럼, 굵고 길게 살면 되잖아."


굵고 짧게와 가늘고 길게의 이분법적 사고의 틀을 깨어 준 한마디이기는 했다. 드물게, 선이 굵은 삶을 잘 유지하며 오래 살다 간 분들이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 말년의 모습은 차라리 보지 않았으면 좋을 것 같은 아쉬운 삶이 많았다. 사회에 영향력 있는 굵은 삶을 오랫동안 길게 끌고 가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나의 선택


나의 선택은 가늘고 긴 삶이다. 어쩔 수 없는 합리화다. 이미 세상에 족적을 남길만한 굵은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 나 자신을 합리화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충분한 굵기로 살지 못했다고 자책할 필요도 없었다. 솔직히, 수많은 삶의 순간들에서, 가지 않았던 길들의 예상 결과와 현재의 삶을 비교해 보아도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지위와 직책과 금전적인 보상의 차이가 있었겠지만, '그래서 뭐?'라는 한 마디에 와르르 무너지는 큰 의미가 있는 차이는 아니었다.


우리 앞집 사리나 할머니는 평생을 작은 포르투갈 산동네에서 살았다. 다른 나라에 가본 적도 없다. 정확하게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우리 동네에 초등학교가 있었던 옛날에 초등학교를 다닌 것이 전부일 것이다. 하지만, 마음씨는 상냥하고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를 좋아한다. 항상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든다. 나는 사리나 할머니의 가늘고 긴 삶을 존중한다. 한결같은 모습으로 가느디 가늘고 길고 긴 삶을 살아낸 사리나 할머니가 존경스럽다.


모든 삶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 모든 삶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어떤 인생이든, 어느 누구의 삶이든 모두 의미 있고 소중하다. 있는 그대로, 살아 나가는 그대로가 그대의 삶의 의미다. 누구와도 비교할 필요도 없는 그대만의 독특하고 소중한 삶이다. 모든 삶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 모든 삶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https://youtu.be/dr0R4zNyGQ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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