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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재 Mar 04. 2022

나를 잊지 말아요
나를 믿지 말아요

[Cloud Mania] 스토리가 있는 구름 감상

[스토리가 있는 구름 감상] 나를 잊지 말아요 나를 믿지 말아요

https://youtu.be/M0viP0AfRxE

구름 영상 제목: 망각의 누적, 촬영 장소: 포르투갈 알가브, 촬영 장비: 삼성 갤럭시 S9


나를 잊지 말아요


옛날 옛적에 다뉴브 강가에 사랑하는 젊은 연인들이 있었다. 어느 날, 이들이 강가를 걷고 있을 때 여태껏 본 적 없는 아름다운 보라색 꽃을 보았다. 청년은 사랑하는 연인에게 아름다운 꽃을 선물하고 싶었다. 강을 건너 꽃을 꺾어서 돌아오다가 강물의 거센 물살에 휩쓸렸다. 그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꽃을 그녀에게 던진 다음 "나를 잊지 말아요!"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아름다운 여인은 물속으로 사라진 연인을 그리워하며 보라색 꽃을 평생 동안 몸에 지니고 살았다.


'물망초(勿忘草)'라는 꽃말과 꽃에 담긴 애잔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청소년기에 나는 울었다. 아쉽게도, 세상에 이리저리 휩쓸리고 순수함이 바닥을 보인 지가 오래된 지금은, "젊은 여인을 혼자 두고 가면서 '나를 잊지 말아라'하는 것은 이기적인 멘트가 아니냐?", 또는, "'여인은 청년을 그리워하며 평생을 (혼자) 살았다'는 구절을 강조하는 것은 전근대적이다"라는 식의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을 생각으로 가득 차 있게 되었다.


물망초의 영어식 꽃 이름이 'Forget Me Not'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또 울었다. 이 콩글리쉬 같은 영어식 꽃 이름의 간결함과 메시지의 강렬함에 감동했다. 물론, 나중에 독일어의 Vergissmeinnicht (vergiss = forget, mein = me, nicht = not)를 번역한 것임을 알았지만, 세월이 가도 '나를 잊지 말아요'를 나는 잊지 않았다.


나를 믿지 말아요


다행히 '나를 잊지 말라'는 물망초의 꽃말은 기억할 수 있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옛날 같지 않다고 실감하는 것이 '기억력'이다. 젊을 때는, 전날 밤에 벼락치기 공부를 하며 한 번만 읽어도 다음 날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기억해서 시험지를 채울 수가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음을 알고 시간 여유를 갖고 외우고 또 외우고 나름대로 철저히 준비했다. 하지만, 막상 시험장에서 외운 전부를 그대로 기억해내지 못하고 기억나는 부분을 기초로 해서 새로운 답안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을 경험하고 나면 심리적으로 상당한 내상을 입게 된다. '아, 이제 머리 쓰는 일은 안 되겠다.'


최근에는 이런 말을 했니 안 했니 하면서 아내와 다투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 현장에 제3의 인물이 있었다면 쉽게 판정이 날 사소한 일인데, 서로 명백한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는 주장으로 타협이나 양보가 안된다. 결국에는 기분이 상하여 반나절쯤 대화가 단절되는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그 원인을 따져보니, 첫째, 어떤 말의 앞부분은 내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이어서 뒷부분만 입 밖으로 말하는 경우다. 내 머릿속에서는 전체 내용이 생성되고 전달된 것으로 남아 있으나, 실제로 아내에게는 일부분만 전달된 것이다. "내가 말했잖아." "언제?" 싸우기가 딱 좋다. 나는 억울하다. 내가 분명히 말했는데. 그럴 때마다 아내는 환장한다.


둘째, 내가 머릿속으로는 A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B로 말하는 경우다. 인접한 두 단어의 초성을 서로 바꿔서 발음하는 '스푸너리즘(spoonerism)'의 증상(예를 들어, '피즈 치자')을 넘어서서, 머릿속으로는 적절한 단어를 떠올리고도 입으로는 다른 단어를 말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힐링캠프에서 "바쁜 벌꿀은 슬퍼할 시간도 없다"라고 말한 박근혜 전 대통령처럼. 이 또한 싸우기가 참 좋다. 나의 머릿속에는 정확하게 표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할 리가 없다. 그래서, 분명히 상대방이 잘 못 들었다고 윽박지르게 된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미치고 환장한다.


어떤 빛은 기억


한 동안 같이 나이가 들어가는 아내 탓으로 생각했는데 대부분 나의 실수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다음부터 나를 믿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솔직히 상당한 기간 동안 '나를 믿을 수 없음'을 스스로 인정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일할 때도, 말할 때도 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실수를 줄이려고 애써고 있다. 다행히, 아직은 견딜만하다. 하지만, 세월이 가면서 기억은 점점 사라져 가고 어두워져 갈 것이다. 나는 어둠의 과정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밤이 깊을수록, 삶이 깊어 갈수록, 한 번씩 빛나는 기억의 별빛은 더 귀하고 아름다울 테니까. 가장 깊은 밤에 별빛은 더 빛나니까.


https://youtu.be/Fw7C6IsDYgI

소우주 (Mikrokosmos) by BTS (방탄소년단) (참고로, 우리 부부는 ARMY다. 포르투갈의 산동네를 지나다가 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면 그곳이 우리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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