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잠에 빠져 있던 인물은 놀라서 눈을 번쩍 뜨며 속옷 바람으로 대청마루를 지나 마당에 납작 엎드린다.
"죄인은 000은 00으로 재직하면서 수많은 비리를 저지른 죄로 체포한다."
새벽부터 대문을 부수고 들어 온 병력의 지휘관이 소리쳤다.
"죄인을 포박하라."
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온 몸을 오라로 묶는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하는 동안에 반항 한 번 못하고 꼼짝없이 묶인다.
"끌고 가라."
부인이 달려 나와서 앞을 막고 머리를 조아리며 울먹인다.
"아이고 나리, 무슨 영문 인지나 알려 주십시오 "
지휘관은 준엄한 표정으로 소리친다.
"어허, 당장 비키시오."
드라마 속의 인물은 투옥되었다가 섬으로 귀양을 갔고, 그 후에 죄를 물어 사약이 내려졌고, 북향 사배하고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그러나, 나중에 밝혀진 진실은, 그의 죄는 반대파의 모함에 의해 조작된 것이었다. 본인의 행위와 진실의 여부와는 상관이 없이, 거짓 정보와 잘못된 판단에 의해서 목숨을 잃게 된 것이었다.
따뜻함의 기준
아내가 불평을 했다.
"샤워하는데 물이 안 따뜻해요. 추워서 혼났네."
도시에서 곱게 자란 아내는 꽁꽁 언 얼음을 깨어서 시냇물에 세수를 하거나 머리를 감아 본 경험이 전혀 없다. 그래서, '따뜻한 물'에 대한 기준이 달라서 항상 신경전을 벌인다. 내심, 너무 편하게 자랐기 때문에 조금 불편한 것도 못 참는다는 생각에 이르고 나는 미간에 힘을 준다.
"이 정도면 따뜻한데 왜?"
보일러 관리의 기술적인 문제는 묵시적으로 남편인 나의 몫이라 보일러 편을 들게 된다.
"아니, 이 정도를 따뜻하다고 할 수는 없지?"
'따뜻한 것은 몇 도 이상으로 한다'라고 법으로 정해져 있지도 않고, 정확한 수치가 법률로 정해져 있다고 해도 측정할 온도계도 없어서 논란이 명확하게 판정될 수 없는 상황이다.
"아 참, 보일러가 왜 이러는 거지?"
부엌 싱크대 위에 설치된 보일러는 견고한 철제 박스 위에 간단한 스위치와 LCD 표시판만 있어서 딱히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보일러에 대한 기술 지식이 없는 나는 괜히 툭툭 건드려 볼 뿐이다. 오래된 라디오가 지지직거릴 때 한 번씩 때리면 소리가 제대로 났던 과거의 경험적 경험을 떠 올리며.
내 인생은 왜 이런지
"이제는 아예 따뜻한 물이 안 나와."
잔뜩 약이 오른 아내가 소리쳤다. 실내 온도가 낮은 주택에서 겨울에 샤워하러 들어가서 물을 틀었는데 따뜻한 물이 안 나올 때의 난감함은 쉽게 짜증으로 번진다. 찬물이 이미 온몸에 튀었고, 추워서 찬물에 몸을 담글 수도 없다. 또, 찝찝해서 샤워는 해야 하는데, 그렇다고, 찬물로 샤워를 하기도 힘들다. 이럴 때는 알아서 기는 것이 현명하다.
"(놀라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아, 그래. 확인해 볼게."
부엌으로 달려가 보니, 정말 보일러가 작동이 안 되고 에러 메시지를 낸다. 전원을 올렸다 내렸다를 되풀이해도 똑같다.
"보일러가 작동이 안 되네. 고장이 났나 봐."
다른 걱정거리도 많은데 보일러까지 애를 먹인다. 왜 문제는 한꺼번에 생기는지 모르겠다. 사는 것이 짜증이 난다. 내 인생은 왜 이런지 모르겠다. 이런 순서로 차근차근 생각이 진도를 나가고, 한 동안 보일러를 쳐다보기도 싫다.
합리적 추론
어떤 일은 회피할 수도 있지만, 어떤 일은 대면해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보일러는 일단 내가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보일러 설치 업자도 모르겠고, 보일러 생산 회사의 대리점이 지역에 있는지 모르겠고, 대리점이 있다고 해도 외진 시골까지 언제 올지 모르겠고, 주말이라 연락이 될 리가 없고, 접수가 되어도 언제 올지 모른다는 것이 '외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이었다.
인터넷으로 우리 집 보일러의 사용설명서를 검색하고, 왔다 갔다 하는 에러 메시지를 확인하였다. '보일러가 점화가 안 된다.', '연통을 확인해라', '온도 센서가 이상하다'라는 메시지가 오락가락하였다.
부엌과 욕실에서 사용하는 온수만은 가스 보일러를 사용한다. 산골 동네라 도시가스가 서비스되지 않기 때문에 LPG 가스통을 배달받아서 사용하고 있다. 주로 대용량 가스통을 사용하는데, 배달이 당일에 오지 않는 지역의 특성상, 대용량이 떨어지면 배달이 올 때까지 임시로 사용할 작은 가스통을 준비해 놓고 있다. 최근에 온수의 온도가 따뜻하지 않다고 해서, 가스 공급에 문제가 있는지 확인할 겸 대용량 가스통에서 응급 시에 사용하는 작은 가스통으로 연결을 변경했다. 그러나, 보일러의 물은 따뜻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가스 공급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고, 보일러 자체의 문제다.
에러 메시지에 따라서, 먼저 연통을 확인하였다. 상태가 양호하고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보일러를 켜도 여전히 점화가 안 된다. 다음으로 보일러의 온도 센서를 확인하는 것만 남았다. 인터넷에 매뉴얼과 여러 개의 질의응답 코너도 찾아보고, 보일러 분해하는 법을 설명한 유튜브 영상도 보았다. 보일러의 앞 쪽 상판을 분리하고 맨 위에 있는 온도 센서를 확인하도록 영상은 설명하였다. 그런데, 영상과는 달리 우리 집 보일러는 주방 싱크대의 상단에 수납장처럼 설치되어 있어서 상판을 분리하기가 어려웠다. 보일러를 먼저 설치하고 나중에 그 위에 싱크대를 설치하였기 때문이다. 골치가 아파서 분해를 하다가 중단했다.
결론은, 보일러 수리공을 부르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는 보일러를 교체하는 것이다. 큰 일이다. 이 동네에서 이런 일을 처리하려면 쉼 호흡을 크게 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일단 믿을 만한 보일러 수리공을 수소문하는 것이고, 보일러 수리공을 찾아도 방문 일자를 조정한다고 한 일주일 걸릴 것이다. 고장이 나서 교체를 해야 한다면, 보일러 주문하고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또 보일러 수리공의 일정에 따라서 교체 공사가 시작될 것이다. 가장 빠른 기간이 2주, 늦으면 4주 정도 걸릴 것이다. 비용과 더불어 일정 조율에 따른 스트레스도 이만저만 아니지만, 2-4주 동안 샤워를 못하면 어떻게 하는지 더 난감하다. 인생 최악의 순간 중 하나다.
가스 배달
일단 보일러 수리공을 수소문하기 전에 다 쓴 대용량 가스통을 교체하기로 하였다. 배달 요청을 했다. 배달이 왔다. 응급용 작은 가스통에서 큰 통으로 가스 밸브를 연결했다. 혹시나 싶어 보일러를 틀었다. 따뜻한 물이 콸콸 나왔다.
보일러는 억울하다
합리적 추론이고 개뿔이고 순 엉터리였다. 큰 가스통과 작은 가스통이 둘 다 동시에 비었던 거다. 가스가 없었는데 보일러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다. 보일러는 계속 에러 메시지를 바꿔가며 자기의 억울함을 읍소하였지만, 소위 합리적 추론으로 무장하여 확신에 찬 나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사약을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의 깨달음
내가 이렇다. 불분명한 정보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얄팍한 지식으로 옳고 그름을 판정하고, 부실한 확신 속에서 세상을 재단한다. 어리석고 부족한 내가 무섭다. 나의 부족함을 알고, 더 겸손해지고, 더 내려놓아야 한다. 보일러야 그동안 미워해서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