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한 번만 더 가르면 안 될까?
오늘도 습관처럼 맘카페의 난임 게시판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환 재수술 후 인공수정에 성공한 케이스가 있기에 넌지시 남편에게 이런 경우도 있다더라 전했다. 사실 내심 긍정적인 대답을 확신했다. 왜냐하면 본인이 할 수 있는 걸 다 하겠다고 호언장담한 그였으니까. 그러나, 그는 고환 수술을 다시는 할 생각이 없다고 확고하게 말했다.
그 대답을 듣고서, 왜인지 모르게 서러움이 복받치고 말로만 듣던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을 받았다. 임신과 출산은 여자 입장에서는 목숨 걸고 하는 엄청난 일이다. 대부분의 경우 살아남지만, 실제로 출산이란 자연분만이 되었던 제왕절개가 되었던 여성 개인의 신체에 있어서는 엄청난 재앙이다. (사건, 이벤트라는 단어로 순화해야 하나 싶지만, 개인적으로 느끼는 바는 그렇다.) 어떤 경우에서는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혹은 못 넘기기도 하는 것이 출산이다. 나에게 있어서 남편과의 가족계획을 세우는 것은 목숨을 걸겠다는 의미다.
그런데, 고작 고환 수술을 못하겠다고? 분노가 치밀었다. 머릿속에서는 '아기가 나올 때 배를 찢던 아래가 찢어지고, 운 나쁘면 죽을 수도 있는데, 너는 고작 죽을 확률도 없는 수술을 아플까봐 못 하겠다고?'라고 고함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타고난 회피성 인간인 나는, 조수석에 타고 있는 내내 밖만 쳐다보고 한숨을 1분 단위로 쉬며 잔뜩 기분 나쁜 티를 냈다. 그렇게 뒤도 안 돌아보고 내린 후, 남편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총총 산책을 떠났다.
찬바람을 쐬어도 여전히 나의 분개는 가라앉지 않았다. 다만 아까까지는 들지 않았던 생각이 들었다. 저 딱한 친구는 임신과 출산을 미디어에서 그리는 하하호호 따뜻하고 행복한 과정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일까. 정보의 비대칭으로, 나는 출산을 '목숨을 건 피투성이 사투'로 인식하고 있고 (극단적인 케이스만 머리에 남아 생긴 편향적 사고입니다.), 그는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아기가 만출된 이후 땀범벅이 된 아내가 그제야 자애로운 미소로 가슴 위에 올려진 아기를 보며 미소 짓고, 남편은 그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 감격하는 한 씬으로 인식하고 있나 싶었다. 이제는 분노가 아니라 안타까움이 들었다. 아니 저 순진하고 어리석은 사람! 출산이란 너의 사랑하는 아내를 잃을 수도 있는 모험임을 왜 모르는가! (과장입니다. 2020년 한국의 모성사망률은 10만 명 당 8.1명, OECD 평균은 10.9명입니다.[1] 대한민국 산과 만세!)
생각이 여기까지 오니 분노가 살짝 가라앉았다. 인간은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하지 않는가. 가엾은 저 친구는 한 달 전 본인의 뽕알이를 희생하는 수술을 받고 충분히 고통을 겪었다. 반면, 3n 년의 인생 동안 임신과 출산의 과정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으며, 관련 지식도 당연히 없다. (교과 과정에 꼭 들어갔으면 좋겠다.) 반면, 나는 고환이 없다. (두둥!) 살짝만 맞아도 엄청 아프다는 소문만 들어서 알 뿐이다. 따라서 비뇨기과 선생님이 내 글을 보면 '그 수술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수술인데.. 저 경을 칠 여편네!'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엄청난 사실을 인지했다. 아직 첫 시험관 시술도 시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즉, 존재하지 않는 두 번째 고환 수술로 왜 나는 화가 나있는가 라는 근본적인 물음이 들었다. 그리고 남편에게서 '내가 더 잘할게'라는 카톡이 와 있었다.
아.. 불쌍한 영혼.. 그만 괴롭혀야지.. 그렇지만 출산의 고통은 확실하게 저 귀여운 머리에 새겨 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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