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자 생활 지침서
개인적으로 세상 필요 없는 걱정거리라고 생각하는 게 두 개 있다. 하나는 연예인, 정치인 등 유명인 걱정이고 나머지 하나는 전 직장에 관한 걱정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이미 떠난 회사를 동경하거나 그리워하는 사람은 적다.
내게 있어 전 직장도 비슷하다. 일하면서 불편했던 적이 많아서 그런지 길거리에서도 직장 동료들을 마주치고 싶지 않다. 굳이 얼굴 붉힐 필요가 없으니 조용히 떠났지만 불만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퇴사하던 날까지 나를 괴롭히던 선배도 기억에 나고 퇴사하면서 나를 뒤에서 헐뜯고 다녔다던 후배 이야기도 생각난다. 물론 내 잘못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기분이 나쁜 건 나쁜 거다.
그런데 갑자기 궁금한 게 생겼다. 당시 회사에 함께 입사한 입사동기의 근황이었다. 나보다 한 달 먼저 퇴사한 녀석은 최근에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동생 같기도 하고 항상 밝은 친구여서 보고 싶어 졌다. 둘 다 시간 여유가 있어 한적한 오후 3시 삼각지역에서 대구탕을 먹기로 했다. 편의상 그 친구를 Y라고 부르려 한다.
Y는 대구탕을 먹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날 날이 너무 좋아서 이태원의 아이리시 펍에 가서 피시 앤 칩스와 기네스를 먹고 싶었지만 그 친구는 대구탕이 먹고 싶어 했다. 낮시간에 Y와 술을 마시는 건 처음이었다. 회사 일을 하느라 낮술은 꿈도 꿀 수 없었으니 처음인 게 당연했다.
서로의 근황을 물어봤다. Y는 여행을 다녀온 거 빼고는 특별한 일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내년까지는 쉬고 싶다는 그 친구에게 나도 모르게 꼰대질을 했다.
"뭐라도 할 수 있을 때 해봐"
"제주도에서 살고 싶긴 해요" / "제주도 게스트 하우스에서 일하면서 시간 보내도 좋을 거 같은데?"
"아 그리고 연애도 하고 싶은데... 그건 마음대로 안되네요"
대구탕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막걸리 한 병이 동났다. 전 직장 동료들과 선배, 회사 일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Y는 세상 사람 좋은 녀석이라 그런지 자기가 아는 사람 모두 잘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회사 생활을 하면서 몰랐던 TMI가 나왔다.
"사실 저 ○○○ 씨한테 좋아한다고 얘기했었어요" / "아?! 진짜?? 난 전혀 몰랐는데"
"그 B선배하고 C선배하고 사귀는 거 같지 않았나요? 비슷한 시기에 퇴사한 것도 그렇고" / "생각해보니 그렇네"
"다음에 시간 되면 J선배 만나려고요" / "난 전 직장 동료 만나는 건 너 하나만 충분할 거 같다. 다른 사람들은 별로..."
역시 다른 사람 험담이 세상에서 제일 재밌나 보다. 막걸리 2병을 비우고 곤이 사리를 시켜 더 먹었다. Y는 오랜만에 집 근처를 벗어나서 그런지 한잔 더 하고 싶은 눈치였다. 하지만 더 마시면 취할 거 같아 다음을 기약했다. 동기라서 그런지 껄끄러운 건 덜했다.
그래도 뭔지 모를 불편함이 있었다. Y나 나 모두 들어주기보다 각자의 얘기를 내뱉었다. 앞에 있을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지 그게 나라는 건 중요하지 않은 모양새였다. 사실 나도 비슷했다. 집에서 나서기 전에는 약속을 취소하고 싶은 만큼 귀찮기도 했다.
술자리가 끝난 후 시원섭섭한 느낌이 들었다. 그 자리를 벗어나니 왠지 모를 편안함도 들었다. 직장 동료는 어쩔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드라마 '미생'처럼 끈끈한 관계도 있지만 대부분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가 직장동료다. 회사를 벗어나도 그 기억은 몸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지하철 반대편에 몸을 실으면서 마지막으로 인사를 했다. '방향이 반대여서 다행이야'라는 못된 생각과 함께 손을 흔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