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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에 대하여

나의 '결'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

by flowbella


나이를 먹으면서 쌓이는 인생의 시간만큼 오래 만난 친구처럼 나라는 사람에 대해 더 깊이 알아가는 것 같다.

수십 년 간의 수많은 선택들이 이어져 지금의 나를 만들었을 것이다. 내가 서 있었을 선택의 기로에서 의식적으로든, 아니든 결정했던 길을 따라 걸어온 결과가 지금일 것이다.


하지만 내 의지대로 선택한 것과 상관없이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아서 결정된 것들도 많다. 우리는 생각보다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환경이란 내가 살고 있는 작은 세계를 둘러싸고 나와 영향을 주고받는 기반, 기틀이다.


환경에 따라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 옳은 것과 그른 것으로 여겨지는 기준 또한 달라질 수 있다. 나의 입장에서 자연스러운 것과 '결'이 같은 환경이 있다면, 그 반대로 나에게 맞는 걸음 하나마다 엇갈리고 저항받는 힘이 존재하는 것 같은 환경도 있다.


'미운 오리 새끼가 사실은 백조'였던 것처럼 자신의 결과 맞지 않는 환경에 놓인다면 온전히 자신이 되려는 것뿐인데도 그것이 틀린 것처럼, 정당하지 않은 것처럼 부정당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 놓인다면 자신에게 자연스러운 것들을 스스로 의심하고 자책하면서 고유한 자신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기준에 의한 판단이다. 우리는 내가 속한 집단의 평균을 '기준'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되기 쉽다. 내가 경험하는 작은 세계 속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나와 다른 기준을 갖고 있다면 그 관점의 영향을 받아 흡수하고 물들게 되기 때문이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은 어딘가 불편하고 부대끼는 감정을 느낀다. 있는 그대로의 내가 올곧이 존재하지 못하는 것 같고, 내가 서있는 작은 공간에 대해서도 자격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나의 존재가 있는 그대로 존중받지 못하는 것을 넘어서 부정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사회 안에서 내 존재를 정당화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우리는 굉장히 큰 슬픔을 경험한다. 이럴 때는 내가 나를 바라볼 때 적용하고 있는 기준이 정말 적합한 것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스스로에 대한 관점이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발현된 것이 아닌, 주변 타인들에 의한 관점이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결'의 집단에 속할 것인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다. 환경은 내 삶이 펼쳐지는 무대 배경과 같은 것이다. 내가 어떤 배경을 뒤에 두고 삶이라는 극을 이어나갈 것인지는 오롯이 나의 선택에 따라 결정된다.


환경이 맞지 않다면, 내 마음의 목소리를 무시하게 하고 내게 당연한 방식을 부정하게끔 한다면 뚜벅뚜벅 환경 밖으로 걸어 나와 내게 자연스럽고, 도움이 되는 환경을 선택하면 된다. 큰 틀의 환경을 바꾸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부분부터 선택해 나가면 된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지만 이 세상 속 어떠한 환경이든,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있어야 할 곳은 없다. 환경은 환경일 뿐, 어디에서, 어떤 사람들과 머물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내 마음의 결'이다.



"나는 내게 맞는 환경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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