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울 태도만 있다면 변화의 환경은 만들 수 있다.
신입사원 시절. 매주 주간회의가 있었다. 회의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팀장님에게 혼나는 자리. 회의에 참석한 모든 팀원들의 소망은 ‘깨지지 않고’ 무난하게 넘어가는 것이었다. 팀장님은 어떤 면에서는 무식하게 혼내고 밀어붙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날카롭게 부족한 점, 미비한 점을 파고 들었다. 그러니 어설프게 잘못을 덮거나 어물쩍 넘어가려 하면 99%는 ‘딱 걸렸다.’ 팀장님 앞에서 우리 팀원들 대다수는 ‘생각없는 사람’ 에 가까운 취급을 받았다. 남들이 보기에는 대기업에서 해외 영업 마케팅을 하는 능력자들이 모여 있지만, 그 안에서는 생각없는 이들의 집합소같은 분위기. 운좋게도 나는 센스 충만한 선배와 같은 지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어느날 선배는 맥주 한잔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해 주었다.
“야, 너 잘 봐봐. 우리 팀 선배들 가끔 한심하게 느껴질 때 있지? 근데 잘 뜯어보면 다들 자기만의 내공이 있어서 저 자리에 있는거야. 각각의 선배들이 어떤 장점을 가졌는지 잘 봐. 그리고 배울만한 건 배워”
나에겐 놀라운 조언이었다. 일단, 내가 선배들을 그런 눈으로 보게되었다는 것을 들킨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안가 선배의 말이 맞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말수가 없고 맨날 예측에 실패해서 혼나던 선배는 알고보니 명문대 응용통계학과를 나왔고, 엑셀을 엄청 잘하는 사람이었다. 다만 분석은 잘하는데 예측은 잘 못했다. (통계는 예측을 하려고 쓰는 걸로 아는데 그 점은 약간 의아했다.) 성격이 급한 다른 선배는 거친 협상을 하는 딜러들과의 거래를 아주 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말을 아끼는 편이어서 내성적인 줄로 착각했던 선배는 언론사 출신의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었다. 당연히 보고서를 잘 썼고, 말투는 부드럽지만 내용적으로는 날카로운 질문을 잘 던졌다. (이 선배는 현재 임원이 되어 잘 나간다.)
하지만 각 선배의 장점이 눈에 보이니 내 실력의 현주소를 냉정하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꼭 알고, 배우고 싶은 것은 물어보게 되었다. (물어볼 대상자가 늘상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기회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가장 크게 얻은 것이 있다. 조언을 해준 선배 덕분에 나는 사람을 보는 지혜를 배웠다. 모든 사람은 걸어다니는 결점 투성이가 맞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씩은 장점이 있다. 그 장점을 중심으로 보면 그 사람이 적어도 잘 미워지지 않는다.
무협소설 ‘소오강호’에는 흡성대법이라는 기공술이 등장한다. 상대를 이긴 후에 상대가 가진 능력을 흡수해버리는 강력한 기술이다. 이후에 많은 히어로물에 등장하는데 주로 악당이 사용한다. (물론 MARVEL 시리즈에도 등장한다.) 현실에서 흡성대법을 쓰면 좋은 점이 있다. 굳이 상대를 이기지 않아도 (죽이지 않아도? ㅎㅎ) 그 사람의 내공을 흡수할 수 있다. 일단 첫번째로 시도해 볼 수 있는 것은 표현력이 좋은 사람을 따라해 보는 것이다. 그의 말투, 표정, 몸짓을 따라해 보는 것이다. 처음에는 당연히 어색하다. 하지만 해보면 안다. 똑같이 하려해도 잘 되지 않지만, 그 패턴이나 감정 등을 느끼기엔 충분하다. 나의 경우 영어가 아주 좋은 모델링 경험이 되었다. 피터 제닝스라는 유명한 앵커가 있었는데 한동안 그 사람의 말투를 따라했다. 신기하게도 몇 달이 지나니 얼추 비슷한 느낌이 나왔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을 얻게 되었다. 바로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태도, 표정들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유명 앵커의 텐션을 매번 접하고 흉내내니 나도 비슷한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영어 실력보다 더 중요한 자산을 얻게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운이 좋아 배울점이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 많다. 가장 가까운 부모, 형제, 친척, 교사, 친구들에게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좋은 동네에 살면 주로 좋은 소리를 듣고 자란다. 다만, 거기서 끝은 아니다. 미국에서 가난한 동네에서 자랐지만 성공한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 학창시절에 최소한, 단 한명의 좋은 교사를 만났다는 것. 그리고 그 교사 덕분에 공립 도서관을 주기적으로 다니게 되었다는 것. 그렇다. 가까운데에 멘토가 없더라도, 도서관을 가서 책 읽는 습관을 들이면 세계적인 멘토들을 만날 수 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한국에는 아직도 도서관이 많은 이들에게는 잘 닿지 않는다. 또한 독서하는 습관이 자리잡히기 어려운 환경이다. 스마트폰 보급률이 최고인 우리나라의 어두운 이면이다. 책보다는 게임과 SNS등에 빠지기 좋은 환경이기 때문이다. (나는 게임을 좋아하고 긍정적인 면도 있다고 보지만 과하게 빠져있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홈트를 주로 하다가 이제는 헬스장을 간다. 헬스장의 정말 큰 혜택이 있다. 열심히 사는 건강한 사람을 만나고 그 자체로 자극을 받는다는 것이다. 병원을 가면 아픈 사람만 보인다. 아파하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만 계속 보면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그런 상황일수록 활기차게 사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 스스로를 놓아둘 필요가 있다. 요즘의 나에게는 헬스장이 그러하다. (과거에는 서점이었다.)
인간은 원래 착각하는 존재다. 주위에 '그러한' 사람만 있으면 세상이 그러하게 느껴지기 쉽다. 선거운동을 할 때 지지자만 모여 있는 자리에서 유세를 하면서 경험하는 긍정적 착각은 후보들이 며칠을 잠도 자지 않고 열정적으로 움직이게 만들어 준다. 임원이 해외 시장을 돌아본다고 하면 현지 주재원은 미리 동선을 짜고 거래처에 우리 제품 좀 많이 깔아놓아 달라고 부탁한다. 임원 본인이 실무자 때 했던 일을 반복한다 할지라도 방문한 임원은 역시나 (어느정도의) 긍정적인 착각을 한다. 군대는? 말해 뭐하겠는가. 이런 현상의 끝판왕이라 해야겠다.
너무 과하지만 않다면 긍정적인 착각은 분명 도움이 된다. 그러니, 좋은 자극을 받을 만한 공간이 아직 없다면.. 하나쯤은 만들어 놓기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