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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이방인이 낯선 대도시에서 보낸 하루간 휴식

두 번째 남미의 대도시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

by mong

20250223 (12일차)

남아메리카 - 칠레 - 산티아고 데 칠레



어제까지의 볼리비아부터 국경을 넘는 21시간의 강행군 끝에, 연속된 10일 만에 고지대를 떠나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하루 동안 달콤한 휴식을 취한다. 어차피 할 것도 크게 없는 도시라 제대로 쉬고 내일 파타고니아로 떠나야겠다는 마음에 일정에 대한 부담이 한결 내려앉는다. 산타이고도 처음에 글을 썼던 리마와 구조는 크게 다르지 않다. 스페인 식민지 시절 구축한 성당과 대통령궁이 있는 구시가지와 새로 구성된 신시가지. 다만 이 도시에 대한 내 편견은 치안적이 매우 불안한 곳이라는 것이다. 남미 내 불안한 정치 상황으로 인해 베네수엘라 등지에서 온 난민으로 인한 범죄가 강력범죄가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숙소도 관광객이 많고 비교적 안전한 지역인 프로비덴시아에 조금 비싸지만 잡았다. 오전 내내 늘어지게 자고 오후와 저녁에 할 것이 있나 좀 찾아 본다. 오, 일요일이라고 축구경기가 있네? 아무래도 좀 위험하겠지만 내가 직관을 할 수 있는 컨디션인지 한 번 체크해본다. 오후에는 서울의 남산 같은 위치에 있는 산 크리스토발 언덕을 갔다가 축구장이나 가야겠다.


칠레 수도 산티아고는 의외로 상당히 이국적이다. 그와 동시에 또 이 여름날은 동남아시아의 느낌도 난다.

제한적이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산티아고는 내 눈에 매우 안전해보였다. 아주 깔끔한 도로와 정리된 주택과 상점들, 한 층 여유로워 보이는 사람들까지 아무래도 부촌에 있어서 그런것도 있나보다. 어떻게 옆 나라인 볼리비아와 이 정도로 차이가 난단 말인가. 날씨는 전형적인 우리나라 여름처럼 덥고 습하다. 여기에 중간중간 야자수들이 보이니 느낌은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들의 외관은 서유럽인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유사하다. 아무래도 페루나 볼리비아처럼 기존 남아메리카 원주민의 피가 많이 안 섞인 듯 하다. 페루와 볼리비아 피부색이 나한테 유리한데 조졌다 이거. 산 크리스토발 언덕은 앞에 언급한 것처럼 서울의 남산 같이 산티아고 도심 한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산이다. 높이도 비슷하다. 이곳을 올라가는 방법은 모노레일, 케이블카 그리고 구불구불한 도로를 이용한 트래킹 길이 있다. 내일부터는 또 파타고니아에서 생고생을 할텐데 굳이 쉬어가는 도시에서 체력을 낭비하지 않기로 하고 숙소와 그나마 가까운 케이블카를 선택하기로 한다.





주말이라 그런지 줄이 아주 길다. 외국인보다는 칠레인들이 주말을 즐기러 나온 정도의 느낌이다. 그들이 힐끗힐끗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지기는 하는데 그만큼 외국인이 흔한 곳은 아닌 것 같다. 산티아고는 특히 요즘 치안 이슈로 웬만하면 더 피하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제 남미 여행자 커뮤니티에서 산티아고 구시가지에서의 강도를 당한 사례가 올라오기도 했었다. 하지만 아직 산티아고에서 아주 다행스럽게도 어떤 위협도 느끼진 못했다. 원래는 동선을 최소화하여 숙소 근처에 있는 코스타네라타워에서 도시의 전경을 보려고 했다. 60층 높이의 이 빌딩은 놀랍게도 남미에서는 가장 높으며 남반구에서는 두 번째로 높은 건축물이라 한다.(1위는 호주) 남미에서 가장 먼저 OECD에 가입한 칠레의 경제적 위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다만 처음의 잠실 롯데타워처럼 주변과 어울리지 않게 둥그러니 놓여있는 형상이긴 하다. 아무튼 후기들을 좀 읽어보니 돈내고 줄서서 보는 코스타네라에서 보는 경치는 산 크리스토발 언덕 정상에서 보는 경치가 훨씬 낫다는 의견이 많아 고민 없이 행선지를 바꿨다.


카톨릭 국가임을 강조하는 듯한 정상의 성모 마리아상

도착한 산 크리스토발 언덕의 정상은 라파스의 전경처럼 딱히 특별하진 않다. 오히려 눈에 띄는 것은 정상에 있는 큰 성당과 성모마리아상이다. 브라질 리우의 예수상처럼 카톨릭 색체의 조형물이 있는게 남미에서의 기조인듯 하다. 페루 쿠스코에서도 비슷한 것을 봤다. 정상에서의 조망의 유리함을 잘 살리지 못했다. 어디서든 남산처럼 탁 트이는 조망은 찾기 힘들다. 아무래도 조망보다는 성당과 성모마리아상의 존재가 더 중요한 듯 했다. 주변에 있는 작은 상점도 산티아고나 칠레의 관광상품은 없고 모두 묵주나 교황 마그넷 등 성당 관련 제품들이다. 카톨릭이 국교이니 당연한 일이다. 산 크리스토발 언덕은 커다란 휴양지처럼 만들어졌다. 케이블카는 시작점에서 정상까지 한 번에 가는 것이 아니라 중간역도 있는데 거기에는 워터파크가 있어 사람이 북적북적 하다. 아주 잠시나마 산티아고 시민이 되어 그들의 주말을 함께 즐기는 느낌이다. 완전히 썩 만족스러운 장소는 아니었지만 로컬의 삶을 어느 정도 경험할 수 있었다는점은 좋았다.





축구장으로!

사실 오후 내내 저녁의 축구경기를 기대하고 있었다.꽤 많은 국가의 도시들에서 축구를 본 경험은 있고 나는 이것을 좋아한다. 축구야말로 유일한 전 세계적 언어이며 그 소통 방식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동일하다. 또한 현지인들 위주로 일반 여행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동과 환호가 존재한다. 도파민에 절여져 있는 나에게 이것은 너무나 재밌는 경험이다. 다만 로컬들로만 구성된 서포터즈와 특히 남미라서 상당히 감정적인 분위기의 축구장이 나에게 안전한 곳인가에 대한 우려는 계속되었다. 특히 또 요즘 평이 안좋은 산티아고라서 말이다. 다른 곳도 아닌 남미라니. 며칠 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두 개의 경기를 보기로 했으니 욕심내지 말까? 하면서도 볼리비아 라파스에서 그 중요한 경기를 놓친 것을 생각하니 또 그러면 안 될 것 같으면서도 일단 티켓부터 있는지 계속 알아본다. 다행히 아직 매진은 되지 않았고 그곳이 안전한지 호텔에도, 챗GPT에도 물어보지만 불현듯 깨달은 점은 어떤 답을 들어도 어차피 나는 갈 것이라는 점. 단지 좀 괜찮은 이유들이 더 필요했을 뿐이다. 경기는 가까운 곳에 있는 국립경기장(한국으로 치면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리고 홈팀은 클루브 우니베르시다드 데칠레였다. 산티아고에서도 꽤 큰 팀이다. 지금까지의 경험 상 축구장엔 많은 군인과 경찰이 배치돼있고, 축구장에선 압사 말고 사망사고가 거의 없었다는 점, 홈팀이면 어떤 외지인도 환영해준다는 것. 경기장의 위치가 안전 지역에다가 그리고 오늘 본 칠레 사람들은 착하다라는 희망을 가지고 보기로 결정했다.


경기장 지하철역의 지속된 떼창은 경기장 분위기와 흡사하다

한 십수년 전부터 축구경기 관람은 신원확인을 요청한다. 외국인은 당연히 여권으로 진행한다. 그런데 웬일인지 온라인에서 구매가 불가하다. 아니 쓰라는 인적사항 내용 다 썼는데 첨부터 안 된다고 할 것이지 결제창은 가기도 전에 무슨 상황인지 벌써부터 짜증이 난다. 경기 시작 한두 시간 전에 현장으로 가서 티켓 구매를 시도해봐야겠다. 내가 머무는 숙소에서 지하철로 세 정거장. 아 지하철. 다시 또 찾아본다. 교통카드를 사고 충전한 다음에 찍고 들어간다. 한국이랑 똑같다. 다만 모든 것이 스페인어와 칠레 페소로 이루어진다는 점. 한 번 찍는데 790페소로 한국 돈으로 약 900원 정도 한다. 저렴하네? 그리고 처음 입장할 때만 카드를 찍고 나갈 때는 그냥 나간다. 이 뜻은 환승 횟수나 거리에 상관 없이 790페소만 부과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잘 보니까 시간대마다 부과 운임이 다르다. 평일 출퇴근 시간 등 러시아워에는 더 비싸고 주말은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괜찮은 시스템인 것 같다. 오늘은 주말이니 딱 왕복 운임만 충전해서 떠나본다. 경기 시작 두 시간 전인데도 파란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며 때때로 지하철 내에서 응원가를 부르기도 한다. 아이를 데려온 아버지, 연인, 노인 등 남녀노소 다양하다. 역시 이런데 열정은 우리보다 훨씬 앞서는구나. 정신없이 구경하고 있는 틈에 보니 지하철역마다 각 역의 문양이 다 다르다. 아이고 디자인하는 공무원들 힘들겠구나. 지하철은 깔끔하고 자주오며 사람도 적으니 이 정도면 탈만 하겠다. 서울 지하철엔 늘 사람이 너무 많아서 힘든데 말이다. 아무튼 경기장 바로 앞에 있는 에스타디오 나시오날역에 도착한다. 내리자마자 엄청난 응원가 떼창이 시작된다. 경기장도 아직 도착 안했는데 확실히 남 눈치 많이 보는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은 아니다. 그래 난 이런걸 보러 온거지.


경기 결과는 1:0 노잼으로 끝

경기장 입구로 걸어가는 내내 파란 유니폼을 입은 홈팬들은 떼창을 부르고 환호한다. 대목이다 싶어 머플러와 음료를 파는 상인들도 소리를 지르고 난리가 났다. 아 얼른 들어가서 좀 더 느껴보고 싶다. 경기장을 가는 이유는 축구경기도 있지만 응원 문화를 보는 것이 가장 재밌다. 축구장 말고 어디서 몇 만명이 떼창과 한 번에 환호를 하는 곳이 있겠는가. 어휴 2시간 전인데도 이렇게 사람이 많으니 빨리 가서 담판을 지어야겠다. 입구에 거의 도착해서 여권을 보여주니 검표원이 무언가를 시도하다 나한테 뭐라뭐라 말한다. 정말 신기한게 스페인어는 영어랑 비슷하고 금방 배운다는데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 아마도 배울 이유가 많이 없었겠지만. 아무튼 당황해하고 있는 나를 보더니 영어를 할 줄 아는 현장 스태프가 나를 데리고 간다. 대충 설명을 들어보니 아직 여권 시스템 검증에 한국은 안 된다고 한다. 아 역시 남미의 행정은 시간이 좀 필요하구나.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 국가들의 여권만 현재 가능하다고 한다. 아마 이 시스템을 구축한지 얼마 안 된 듯 한데 그것도 이해가 가는게 동양사람이 칠레에서 축구를 본다? 특이한 일이긴 하다. 어쩐지 외관상 외국인은 안보이고 다들 나만 쳐다보는 느낌이긴 했다. 칠레페소 현금도 좀 남는데 뒷돈을 찔러 넣어줘 볼까? 그런데 이 경기가 그 정도의 가치가 있나 싶으면서 또 이 제안을 받는 사람에게 모욕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든다. 불가능한데 뭘 어쩌겠어. 어쨌든 나는 다 시도해봤으니 미련 없이 그 장소를 떠난다. 호텔에 가서 TV로나 봐야겠다. 아, 생각해보니 볼리비아에서도 동일한 이슈가 있었을 수도 있겠다. 볼리비아의 행정은 처참한 수준이니까. 그들의 열정을 간접적이로나마 느껴서 어느 정도 만족한다. 숙소에서 TV로 본 경기는 다행인지 재미가 없었다. 경기 시작 2분 만에 홈팀이 골을 넣고 내내 소강상태로 있다가 끝나버렸다. 아 홈팀이 어쨌든 이겼으니까 분위기는 좋았을까. 이왕 이렇게 된거 휴식을 취한다. 내일은 아침 일찍부터 파타고니아의 관문 대륙 남쪽의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떠난다. 페루 - 볼리비아 - 칠레로 이어진 이번 여행의 파트1을 마무리하고 파타고니아의 자연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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