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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노트 Jun 13. 2024

기본을 전부로 만들다

밀도


처음으로 소개할 브랜드를 어디로 할지 생각보다 고민을 더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의 정체성이 첫 소개에 결정될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이 불현듯 스치더군요. 후보군이었던 여러 브랜드 중 '밀도'는 가장 안정적인 선택지였습니다. 지나치게 대중적이거나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라고 할 수 없는 적당한 브랜드 인지도를 가지고 있고, 밀도를 연상되게 하는 단어가 정말 직관적이니까요.


'식빵'


요즘 프리미엄 식빵의 선택지는 꽤나 넓어졌습니다. 2010년대 후반, 식빵 열풍을 일으켰던 교토마블과 밀도에서 시작해 화이트리에, 타쿠미야처럼 생식빵이라는 개념을 활용하는 베이커리가 유명해졌어요. 식빵 자체의 개념도 식사를 대용하는 빵에서 간식의 개념으로, 단순한 밀가루 빵에서 버터나 생크림을 혼합한 고배합 식빵으로 영역을 넓혀왔습니다. 그 중심에 밀도가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닌 듯해요.


사진: 네이버 지도의 밀도 성수점


밀도를 처음 알게 된 건 서울숲을 지나며 밀도 성수점 앞에 길게 늘어선 웨이팅을 우연히 마주친 산책길이었습니다. 당시 일행이 식빵을 사기 위해 서 있는 줄이라는 걸 알려줬는데 사실 처음엔 식빵 때문에 웨이팅을 선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정말 맛있다고 몇 번을 얘기해 줬는데도 말이죠. 그게 밀도에 대한 제 첫인상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5년 전 정도의 일이네요. 그 기간 동안 식빵에 대한, 그리고 밀도라는 브랜드에 대한 제 인식의 변화가 어땠는지를 상상해 보면 참 재밌습니다. 어떻게 보면 180도 바뀐 것 같기도 해요. 이게 브랜딩의 힘 아닐까요? 브랜드가 추구하는 가치를 고객에게 얼마나 잘 설명했는지. 그런 면에서 밀도는 브랜드로서 참 이상적인 표본 같습니다.




식빵이 맛있는 온도, 밀도



밀도가 탄생하기 이전, 밀도를 오픈한 전익범 셰프는 용인에서 풀 베이커리 '시오코나'를 운영했어요. 밀도와는 다르게 하루에 100종 이상의 방대한 메뉴를 만들었는데 모든 빵의 품질을 유지하는데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렇게 시오코나를 정리하고 '기본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식빵을 전문으로 하는 밀도를 오픈하게 됩니다. 시오코나에 대한 고객들의 몇몇 리뷰가 남아있어 참고해 보니 당시에도 빵이 정말 맛있었다고 해요. 그럼에도 스스로에 대한 부족함을 인지하고 기본으로 돌아가는 전익범 셰프의 자기 성찰과 용기가 대단하다고 느껴집니다. 단순히 빵의 종류를 줄이는 게 아닙니다. '식빵'에 올인하는 그 선택이 말이죠.

앞서 보였던 저의 옛 편견처럼 전익범 셰프의 이 선택에 대해 주변의 우려도 많이 존재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식빵 하나만 제대로 만들겠다는 마음가짐과 세밀한 연구 끝에 밀도를 대표하는 식빵이 탄생하게 됩니다. 자신의 가치관에 맞는 브랜드가 탄생한 순간이겠죠.


사진: 네이버 지도의 밀도 강남역점


왜 식빵이었을까요? 전익범 셰프는 가장 기본이 되면서도 어려운 빵이 식빵이라고 말합니다. 말 그대로 식사용 빵인 만큼 소비자의 식탁에 언제든 오를 수 있는 게 식빵이기에 화려한 디저트와는 다른 의미로 접근해야 합니다. 식빵은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담백함이 중요하죠. 기본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전익범 셰프는 빵집의 가장 기본인 식빵에 집중하기로 결정합니다. 빵집의 기본인 식빵이 맛있다면, 사람들은 그 집의 케이크와 쿠키도 먹고 싶을 거란 믿음으로요.

밀도의 빵은 재료와 공정, 생산기술의 세 가지 원칙을 준수하며 품질을 높여갔습니다. 청정 지역에서 재배된 밀 원재료를 선별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이는가 하면, 어떤 재료를 어떻게 배합했을 때 식감과 풍미가 좋은 식빵의 맛을 낼 수 있는지 계속 테스트해 나갑니다. 무엇보다 이렇게 선별된 재료와 테스트를 거친 공정을 조금의 오차도 없이 구현하는 생산기술이 밀도의 핵심이에요.

그렇게 서울숲 맞은편 작은 매장으로 문을 열게 된 식빵 전문 베이커리 밀도 성수점. 무지방 우유와 유기농 밀가루로 만든 '담백 식빵'과 생크림을 혼합해 고소한 맛과 부드러움을 살린 '리치 식빵', 아담하지만 다양한 풍비를 더한 '큐브 식빵', 시오코나의 시그니처 메뉴였던 '스콘' 등, 기본에 집중하며 많지 않은 메뉴로 기획된 밀도는 금세 식빵을 사러 줄을 서는 빵집이 됩니다.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모 연예인이 마감 시간쯤에 식빵을 사러 줄을 섰다가 재고 소진으로 구매에 실패했던 게 화제가 되기도 했죠. 밀도라는 브랜드는 소비자의 인식에 그렇게 점차 자리 잡혀 갔습니다.




브랜드는 집중이 필요하다



브랜드를 기획할 때 타깃층을 특정하거나 시장 범위를 좁히는 일에 의구심을 내비치는 경우를 빈번하게 봅니다. 아직 손에 쥐어지진 않았지만 스스로 잠재적인 고객을 배제한 듯한 느낌이 들어서겠죠.

반면, 밀도는 기본으로 돌아가기 위해 식빵에 집중해 고객을 얻습니다. 빵집의 기본인 식빵이 맛있으면 쿠키도, 케이크도 먹고 싶을 거란 밀도의 믿음을 건 도전이었죠. 아마도 처음 밀도를 기획할 땐 이렇게 큰 브랜드가 될 거라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실패할지도 모르는 불안함에도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었던 건, 빵 품질에 집중하기 위한 브랜드 철학 덕분이에요.


브랜드는 집중이 필요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첫째로 소비자의 브랜드 연상 가능성을 높여줍니다. 브랜드를 '소비자와의 관계를 통해 만들어지는 소비자의 종합적인 경험'이라고 정의했었죠. 즉, 브랜드는 소비자가 종합적인 경험을 통해 느끼는 인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밀도를 식빵의 성지라고 표현했는데, 각자의 경험 차이를 반영하더라도 밀도를 경험한 많은 사람들은 밀도를 '식빵'의 범주 내에서 인식할 겁니다. 집중의 힘은 연상을 가능케 하는 그 단순함에 있어요.

둘째로 내부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활동에 일관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요즘 매장을 운영하는 게 일종의 종합 예술이라는 말을 흔히들 합니다. 직원을 뽑고 관리하는 일부터 매장의 인테리어와 운영, 메뉴 기획에 고객 관리까지 다 관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죠. 마치 작은 사업체와 같습니다. 회사로 따지면, 각 부서에서 역할에 맞게 해야 할 일이 구분 없이 산재되어 있다고 할까요? 그런 활동이 각기 다른 목소리를 낸다면 배는 산으로 가게 됩니다. 이런 일이 작은 매장 규모에서도 꽤 빈번하게 일어나요. 반면, 밀도에서 진행하는 모든 마케팅, 매장 운영, 직원 교육, 서비스 응대 등의 활동은 식빵의 높은 품질을 유지하는데 집중하겠죠. 밖으로 노출될 때의 단순함만큼이나, 브랜드 인식은 내부적인 유대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소비자는 브랜드의 철학을 보고 있다



브랜드의 집중을 끌어내는 건 브랜드가 추구하는 가치와 철학입니다. 밀도에게는 식빵 하나만큼은 최고의 품질로 만들겠다는 철학이 있어요. 소비자는 이런 브랜드의 철학을 봅니다. 소비자가 자세히 관찰하는 게 아니라, 스치듯 은연중에 만나게 됩니다.

예를 들면, 밀도에는 빵이 구워져 나오는 시간이 정해져 있고, 갓 나온 빵은 열기 때문에 모양이 뭉개질 수 있어 커팅이 불가능하다는 안내가 쓰여 있어요. 집에서 따로 커팅하기 귀찮은 소비자는 아쉬워하며 이미 커팅이 되어 있는 식빵을 담습니다. 갓 나온 빵을 좋아해 통으로 구매하는 소비자도 있죠. 이들은 매장에서 따로 설명을 듣진 않지만, 식빵의 품질 유지를 위해 정해진 공정 과정을 준수하는 밀도를 봅니다. '식빵을 만드는 가장 맛있는 온도'라는 밀도의 타이틀에 담긴 철학을 소비자는 자연스럽게 경험하게 되는 거죠.


기본을 전부로 만드는 브랜드의 비밀은, 이렇듯 소비자가 브랜드의 철학을 경험하도록 설계하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우리는 브랜딩이라 부릅니다. 사실 좋은 원재료를 쓰고, 제품의 품질에 투자하는 게 특별한 일은 아니에요. 음식에 자부심을 가지고 매장을 운영하는 사장님들은 정말 많죠. 심지어 2010년대 후반에 식빵 열풍을 이끌었던 브랜드에 밀도가 유일한 매장은 아니었습니다. 기사에도 나오고 방송도 탔던 매장들을 찾아보니 현재는 영업을 종료한 경우도 많았어요. 밀도가 식빵으로 차별화한 베이커리라 특별한 게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밀도의 특별함은 빵에 대한 철학과, 이를 소비자가 접하면서 쌓아가는 경험에 있습니다.






최근에 재미있는 소식이 들렸어요. 2024년 4월, 밀도가 매일유업과 영업양수도 계약을 맺었다고 합니다. 매일유업이 베이커리 사업을 본격적으로 확장하기 위해 밀도의 사업권을 인수했어요. 사업을 운영하는 주체가 바뀌면 브랜드의 방향성이 달라지기도 하는데 약간의 걱정도 듭니다. 그럼에도 밀도의 브랜드 철학은 워낙 단순하고 강력해서 쉬이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도 있어요. 매일유업의 서포트를 받은 밀도는 날개를 달아 베이커리 카테고리에서 더 영향력 있는 브랜드가 될 수 있을까요? 아니면 브랜드 철학에 어울리지 않는, 맞지 않는 옷을 입게 될까요?


앞으로의 행보가 정말 궁금해지네요. 소비자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브랜드인 만큼 좋은 방향으로 발전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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