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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y Jul 20. 2024

05. 아벨의 죽음, 그 당혹스러움

카인의 살인을 생각하고 정리하다가 감당치 못할 문제를 만났다.

생각에 없던 이 문제가 나타나 나를 괴롭혔다.

그것은 아벨은 선을 행해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음에도 악을 행한 카인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전능하심으로 아벨을 살려내지 않으셨고 카인을 즉결심판해 죽이지도 않으셨다.


다만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이후에 받은 저주, 땅을 가는 고통과 해산의 고통에 더해 땅을 갈아도 아무런 소출이 없으며 때문에 이곳저곳을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라 하실 뿐이었다.

오히려 그렇게 유리하며 살아갈 때 사람들에 의해 해를 당할까 두려워하는 카인에게 표를 주어 카인을 만나는 자들이 카인을 죽이지 못하게 보호하신다.


그런데 카인은 땅의 소출이 없을 것이고, 때문에 정착하지 못하고 유리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하나님의 저주를 무시하고(또는 극복하고) 에덴의 동쪽 놋 땅에 정착해 결혼하고 자식 낳고 성을 쌓고 보란 듯이 잘 산다.

아마도 카인의 두려움은 생존의 욕망을 더 극대화해 보란 듯이 가족을 이루고 스스로를 보호할 성까지 쌓아 올리게 했던 것 같다. 어쩌면 그 성과 가족들로 안락함을 얻어 자신을 저주하신 하나님을 조롱했을지도 모르겠다.


선과 악, 두 가치가 서로 충돌할 경우 보이는 불변의 결괏값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다.

이후 악인의 형통함은 성경에서 계속 등장하는 아이러니이다.

많은 의인들이 악인의 형통함을 두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성경 속뿐인가?

현재를 살아가는 중에도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과 악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형통은 지속적으로 대비되어 보인다.

이런 현실을 보며 악을 택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그저 힘이 없어 더 큰 힘을 갖고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당하고 살지만, 어느 날 힘을 얻게 된다면 그들보다 더 큰 악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할 존재들이 얼마나 많은가? 아니 힘을 얻기 전이라도 나보다 약한 존재들에게 악을 행하는 것은 어떤가?


이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이런 현실 속에서도 불이익과 죽음을 감수하고라도 선을 행하는 자들도 있다.

그들은 과연 무엇을 보았기에 선을 행함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일까?


한참을 이 문제로 생각이 깊어졌다.

악을 행함은 당장의 이익이 보이기에 그 동기는 충분하다 못해 넘쳐난다.

그런데 선을 행하면 이익보다는 손해이며, 어쩌면 어리석다 손가락질받는 상황까지 감수해야 한다.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 그 동기는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하나다.

하나님이다.

선을 선으로 악을 악으로 보응하실 하나님을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보이는 것은 단 하나, 악함 뿐이다.

때문에 하나님과 하나 되지 못하고 분리된 것이 죄의 시작이며 그 끝은 완벽한 죽음일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과 하나 됨, 즉 그분을 의지해 선을 행하는 것이 당장은 어렵겠지만, 또는 죽음을 각오해야 할 수도 있지만 그 끝은 영원한 삶일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아벨의 죽음이 그냥 억울한 죽음으로 끝난다면?

선을 행함으로 불이익과 수치를 당하는 것이 끝이라면?

하나님이 존재하셔야 하는 이유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니 현실의 삶이, 그 삶 속에 겪어 내야 할 상황들이 당혹스럽고 암담하기만 하다.

하나님을 믿는 나의 내면의 동기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신앙, 어찌해야 할까?

그저 하나님이 나를 더 꼭 붙잡아 주셔서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 되길 바랄 뿐이며, 불합리한 현실의 삶을 감당할 마음과 위로와 평안이 임하길 바란다.

하지만 형통함도 허락하시길 기도한다.

실제로 성경에 등장하는 아브라함과 같은, 다윗과 솔로몬과 같은, 믿고 의지하는 자의 형통함이 내게도 임하길 말이다.


P.S

이 글은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이 스스로가 스스로의 주인 되어 자신의 욕심대로 살기로 작정한 삶인 것을 카인이 아벨을 죽인 것으로 명확하게 나타났음을 그러므로 하나 됨이 깨어지게 된 것을 설명하는 내용으로 정리하려 했다.

그런데 예상치 않게 아벨의 삶은 죽음으로 끝나고 카인의 삶이 오히려 계속되는 것을 보고 생각이 깊어져 글도 길어졌다.


선한 자의 억울한 죽음.

이래도 되는 것인가 싶었다.


우주와 자연에서도 물리법칙으로 대변되는 인과관계에 의해 그 결과 값이 나타나듯, 인간사 또한 모든 것이 그 행한 대로 이루어져 보응받게 됨이 마땅한 것이라면 이 땅에서 아무런 보응을 받지 않고 억울하게 죽임 당한 아벨과 같은 삶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때문에 죽음 이후에라도 보응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 것이다.


천국과 지옥이 있는지 없는지 사실 30년의 신앙생활에도 반신반의했다.

사실 죽어서 가는 천국 보다 이 땅에서 이루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함이 더 컸었다.

그런데 오늘 아벨의 죽음을 보고 이 땅에서 완벽한 하나님의 나라는 어렵겠구나 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선포하신 천국이 실재해야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강조하신 억울함이 없는 상태가 이루어지는 유일한 방법임을 깨닫게 된다.

선한 자의 고통과, 눈물, 억울한 죽음에 천국이 실재하는 것만이 우주적 법칙에도 부합하는 매우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물론 왜 구약에는 천국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 의문이 든다.

마치 천국이 아니라 선택된 민족을 통해 지구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시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 선택된 나라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온 땅에 선포하고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을 그 영광에 동참시켜 마침내 이 땅을 다시 회복시키시려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인 것 같아 보인다는 것이다.


의문이 남지만 의문은 의문대로 남겨두고 오늘의 깨달음에 집중해야겠다.

언젠가 이 의문도 깨닫게 하실 것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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