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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아미 Oct 21. 2021

미래에도 살아남는 잡지에 대한 몇 가지 질문

이것은 한 무명 창작자의 작은 실험에 대한 이야기다




미래에 잡지가 살아남기 위한 필수 조건은 무엇일까. 구독자 수? 발행부수? 광고수익? 실력 있는 필진과 유익하고 탄탄한 콘텐츠? 혹은 최신 트렌드에 발 빠르게 대응하는 선견지명? 한동안 잡지판에서 열심히 일할 때만 해도 내 생각은 그랬다. 잡지는 기자, 디자이너, 포토그래퍼 등 창작자들의 분투와 수천 번의 밤샘, 마케터, 기획자 등 조력자들의 협업으로 이뤄지는 종합예술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생각은 완전히 달라졌다. 잡지가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로지 돈이다. 정확하게는 자본을 담당하는 결정권자의 의지와 사정에 달려있다. 이 글은 그 절대적 진실에 저항해보고자 하는, 한때 잡지를 사랑했던 한 무명 창작자의 작은 실험에 대한 이야기다. 


대형 여행 잡지의 몰락

최근, KTX매거진이 무기한 휴간에 들어갔다. 지난 18년간 매달 10만 부를 발행해온 국내 최대 여행 잡지가 갑작스레 발행을 중단한 배경은 다소 복잡하다. 표면적인 이유는 코로나 여파로 인한 제작사의 부도였지만, 이전부터 방만한 경영으로 유명했던 S업체의 부도는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었다. 그보다는 매거진을 발행하는 주체인 코레일 측의 다소 기형적인 사업 운영 방식이 도마 위에 올랐다. 자사 고객들을 위한 서비스 차원에서 매거진을 제작하는 데 비용을 투자하기는커녕 오히려 제작사로부터 수억 원에 달하는 공모가격을 요구했다. 제작사에게는 KTX라는 이름을 걸고 차내에 매거진을 비치할 수 있는 권리만을 넘겨주며 알아서 광고를 수주하고 비용을 충당하도록 한 것이다. 코로나 여파로 광고 영업이 어렵게 되자 제작사는 제작비를 아낄 수밖에 없었는데, 그 아끼는 방법이란 참으로 간단했다. 매거진의 콘텐츠를 제작하는 기자들, 포토그래퍼들에게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게 짧게는 몇 달, 길게는 수년에 달하는 임금을 받지 못한 콘텐츠 창작자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음에도 코레일은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있다. 




잡지 시장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열악한 창작 환경

한 번이라도 잡지 산업에 종사해본 창작자라면 이 뉴스를 남의 얘기로 치부할 수 없을 것이다. 근로계약서는커녕, 특별한 양해도 구하지 않고 페이가 밀리는 게 일상인 노동 환경. 프리랜서가 아닌 회사에 소속된 기자라고 해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결정권자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 해도 다 만들어놓은 매거진이 인쇄 직전에 올스톱되기 일쑤다. ‘어떻게 하면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까?’ 밤 새워 기획하고, 발로 뛰며 취재하고, 몇 번의 퇴고와 수정을 거쳐 완성한 콘텐츠는 한순간에 휴지조각이 된다. 교정교열자, 디자이너, 포토그래퍼, 취재원들과 서로 등 두드려가며 협업한 시간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물론, 페이 지급이 안 되는 상황에 대한 사과까지 해야 하는 입장이 된다. 그렇다. 모두 본인이 경험한 얘기다. 시간이 많이 흘렀고, 필자가 몸담았던 수많은 매거진들이 휴간 혹은 폐간을 선언하며 역사 속에 사라졌다. 많은 창작자들이 진저리를 치며 잡지판을 떠났고, 한 여성지에서 반 년치 연봉을 떼였던 필자도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 현재 필자는 스스로 발행인이 되어 매달 정기간행물을 발행하고 있다. 그것도 수익성 제로인 웹진을.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콘텐츠 창작자전자출판을 배우다

이야기를 하려면 전자출판에 처음 관심을 가졌던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0년 넘게 수많은 잡지에서 칼럼과 에세이를 기고하며 원고료로 연명해온 프리랜서였던 필자에게 남은 건 폐지 그 이상 이하도 아닌 과월호 잡지들과 이름을 걸고 써왔던 콘텐츠들뿐이었다. 물론, 수백 킬로에 달하는 잡지는 이내 천덕꾸러기가 되어 재활용품 수거장에 갖다 버려야 했다. 이미 사양길을 걷고 있는 잡지판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가진 기술이라고는 콘텐츠를 만드는 일밖에 없었던 필자에게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내가 만든 콘텐츠를 내가 직접 팔아보자, 라는 야무진 다짐으로 이어진 건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러니까 전자출판은 시의 적절하게 만난 대안이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나 디지털북센터 등의 기관에서 제공하는 교육과정을 찾아다니거나 유튜브 검색을 통해 독학으로 Sigil 프로그램 다루는 법을 배웠다. 출판사 등록을 하고 사업자를 냈다. 서점 몇 곳과 계약을 하고 예전에 기고했던 칼럼들을 주제별로 모아 전자책으로 만들어 냈다. 그 칼럼을 기고했던 잡지들은 이제 세상에 없지만, 콘텐츠는 남아서 ‘내게 커피값이라도 벌어주고 있다’라는 사실이 묘한 쾌감을 안겨주었다. 주변에는 나와 비슷한 처지의 작가들이 많았다. 왜 기껏 쓴 원고를 썩히고 있냐고, 내게 주면 책을 만들어 팔아주겠다고 구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지랖을 부린 것이 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전자출판으로 배운 출판의 기쁨

현재 필자는 ‘아미가’라는 이름의 1인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다. ‘아미가Amiga’란 스페인어로 ‘친구’라는 뜻의 여성 명사다. 그러니까 주변의 여성 동료작가들의 책을 대신 만들어주기 시작한 것이 내가 출판업에 뛰어들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지금은 ‘아미가’의 범위가 훨씬 넓어졌다. 스스로 창작을 하는 여성 작가라면 누구에게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복잡한 기술이나 디자인을 적용시키는 게 아니라면 전자책(ebook)을 만드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경력단절여성의 육아 에세이, 50대에 사표를 던진 직장인의 제주 한 달 살기 여행기, 이른 임신을 한 밀레니얼 세대의 고백 에세이 등등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어 냈다. 비용이 거의 들지 않고 절차가 간단한 전자출판이기에 수익성을 따지지 않고 출판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수익성은 저조했으나 개인의 이야기를 발굴해 출판을 통해 보편적 가치를 획득하는 작업은 꽤나 즐거웠다. 

문제는 남의 얘기를 책으로 만드느라 정작 내 콘텐츠를 만들 시간이 부족해졌다는 것이다. 문득 기고처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창작자에게 정기적으로 기고할 수 있는 기고처의 존재는 꽤나 소중하다. 많지 않아도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원고료는 쏠쏠한 수입원이 되고, 외부에서 지정해준 마감일은 창작의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쓰고 싶은 글을 스스로 써서 투고할 수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녹록치 않다는 것은 많은 프리랜서 작가들이 동의하는 바다(절대 핑계가 아니다). 


자본 없이 매거진을 만들 수 있을까

그러나 이미 잡지판을 떠난 필자에게 그 어느 곳에서도 청탁이 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스스로 기고할 곳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처음엔 의구심이 들었다. 과연 자본 없이 매거진을 만들 수 있을까. 그것도 매달? 아무리 웹진으로 만든다고 하지만, 편집장도, 기자도, 디자이너도 없이? 오직 창작자들의 자발적인 참여만으로 지속적인 잡지 발간이 가능할까? 원고료를 지급할 자본도 없는 상황에서 창작자들의 자발적인 참여는 어떻게 끌어낸단 말인가. 아니, 애초에 이런 시도를 한 매거진이 있기는 했던가. 

수많은 질문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오직 한 가지 답만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어쨌거나 만들어보고 싶다’. 그러니까 자본이 없는 1인출판사에게 종이잡지는 처음부터 선택지가 되지 못했다. 수없이 민폐를 끼치며 사라져간 종이잡지 때문에 나와 내 친구들이 얼마나 상처를 입고 애를 먹었는데, 내가 같은 일을 벌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 아미가출판사에는 필자와 뜻을 함께하는 ‘아미가(친구)’들이 있었다. 그들 또한 대부분 프리랜서였고, 지속적인 창작활동을 위해서라도 마감 있는 삶이 간절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때마침 코로나 시국이 시작되면서 많은 프리랜서들에게 마감이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기획을 하고, SNS로 홍보를 하고, 로고를 만들고, 잡지 이름을 정하고, 원고를 모았다. 그렇게 두어 달 만에 새로운 매거진이 뚝딱 탄생했다. 2W매거진이다. 







알라딘 캡처, 각권 1000원에 판매 중이다




자본 없이 매거진을 만들 수 있을까





세상에 이런 잡지가 있었나

2020년 7월. 무자본에, 수익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매거진이 탄생한 것이다. 1년 한 바퀴를 돌아 어느 덧 17호를 만들고 있으므로 적어도 한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은 찾은 셈이다. 자본 없이 매거진을 지속적으로 발행할 수 있을까. 정답은 가능하다. 

매달 새로운 이슈를 발행하고 있는 2W매거진은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발행인인 필자가 편집장이자 마케터, 디자이너이자 제작자로서의 역할을 도맡고 있다. 편집부는 없고, 6개월 단위로 기획위원(아미가클럽)을 모집해 피드백을 나누고 아이디어를 모으고 있다. 월 1회, 줌 화상회의를 통해 기획위원들이 모이는데 이 때 함께 논의해 다음호 주제를 정한다. 원고 모집은 약 2주간, SNS와 기획위원들의 자발적인 홍보활동을 통해 이뤄진다. 투고 자격에는 ‘여성’이라는 성별 외에는 어떤 제한이나 조건도 없다. 누구나 자유롭게 투고할 수 있으며 자체적으로 정한 필명 외에는 어떤 정보도 공개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놀랍게도 매달 상당한 양의 투고가 이어지고 있다. 

한 때는 투고 받은 원고를 가능한 한 다 실으려고 했으나, 가독성의 문제로 15편에서 최대 20편의 원고만 싣는 것으로 결정했다(이 또한 기획회의를 통한 다수결의 결정이다). 즉, 주제에서 좀 벗어나거나 함량이 모자라는 원고는 적당히 걸러지고, 한 가지 주제를 맥락 있게 이야기하는 에세이 웹진의 구성을 갖추게 되었다는 얘기다. 편집과 교정교열은 본인과 편집국장 역할을 하는 동료 작가가 교차로 체크하며 보고 있다. 때에 따라 페미니즘 주제 칼럼과 그림 에세이 등 연재코너와 시, 소설 등 자유기고가 더해지기도 한다. 구성이 비교적 단순하기 때문에 epub2 파일로 만드는 작업은 단 하루면 충분하다. 각 필자들이 알리고자 하는 자신의 채널이나 SNS 링크가 전자책에서 바로 연동될 수 있도록 작업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릴 뿐이다. 10월에 발간된 이슈에서는 ‘인생 책’을 주제로 글을 받았는데, 에세이 말미에 해당 필자가 추천하는 책의 판매 링크를 연동해 두어 원하는 경우 바로 구입할 수 있도록 했다. 대부분 모바일로 전자책을 보기 때문에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기능이다. 그러다보니 자주 원고를 기고하는 필자들끼리는 자연스럽게 커뮤니티가 형성되고 SNS를 통한 교류도 이뤄지게 된다. 이 또한 매거진의 순기능이다. 


독자와 창작자는 다르지 않다

다시 질문을 던지고 싶다. 어째서 필자들에게 원고료 한 푼 주지도 않고, 벌지도 못하는 매거진의 지속적인 발행이 가능할 수 있는 걸까. 어째서 수십 명의 필자들이, 누구도 강제하지 않는데도 기꺼이 마감일에 맞춰 원고를 내놓고, 또 스스로 구입해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걸까. 과연 이 매거진의 존재 이유는 뭘까. 

2W매거진은 자본을 생산하는 매거진이 아니라 콘텐츠와 작가를 생산하는 매거진이다. 독자의 니즈를 충족시키고, 더 많이 팔리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얘기다. 독자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기 보다는 애초에 창작자와 독자가 그리 다른 존재라고 보지 않는 까닭이 더 크다. 그리 크지 않은 출판 시장에서 책이나 잡지를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독자들 중 많은 수가 이미 창작자이거나 예비 창작자다. 2W매거진을 통해 지속적으로 글을 기고하는 필진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에게 여성들끼리의 연대라는 안정적인 테두리 안에서 지속적으로 작품을 발표하는 경험을 통해 작가로서 성장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10회 이상 기고한 원고가 모이면, 개개인 별로 수개월에 달하는 퇴고, 수정, 편집 작업을 함께 하며 전자책 단행본으로 발간해주는 ‘에세이스트 프로젝트’도 진행 중에 있다. 필자가 운영하고 있는 아미가 출판사에서는 이러한 시스템을 통해 지속적인 신인 작가 발굴이 가능하기 때문에 1인출판사임에도 한 달에 2~3권에 달하는 신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잡지의 새로운 숙제

그렇게 매달 약 수십 명에 달하는 기명, 익명 저자들의 콘텐츠를 모아 상당한 분량의 웹진을 출간한지 벌써 2년차다. 가볍게 생각하고 시작한 것치고는 필자가 해야 할 역할이 생각보다 많아서 조금 당황스럽긴 하지만, 그만큼 재미와 보람이 있어서 힘닿는 한 계속해서 만들어볼 작정이다. 

사실, 2W매거진이라는 독립웹진의 문제점은 바로 이 지점에 숨어있다. 자체적으로 굴러가는 시스템이 아니라 필자의 개인적인 의지와 노력이 수반되지 않으면 즉시 발행이 중단될 수도 있다는 연약한 구조 말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현재도, 그리고 앞으로도 많은 고민이 필요하겠지만 큰 걱정은 없다. 답이 안 나올 때는 주변의 ‘아미가’들과 머리를 맞대면 되니까. 

개인적으로, ‘웹진이 매거진의 미래가 될 수 있을까’, 즉 웹진이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잡지시장에서 명쾌한 대안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2W매거진도 마찬가지다. 많은 필진들의 참여로 지속적인 결과물을 내놓고는 있지만 사업적인 면, 즉 수익성을 봤을 때는 미래가 그리 밝지는 않다. 필자가 이 돈 안 되는 사업에 시간을 투자하며 장기적으로 주목하고 있는 지점은 사업적인 발전가능성이 아닌 잡지의 역할을 새롭게 재정의하는 측면이 더 크다. 최근, 집지산업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문화콘텐츠산업에서 어마어마한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그 속에서도 동료들과 계속해서 작품 활동을 이어나가고 싶다는 한 무명 창작자의 욕심과 열심이 이 실험을 무사히 성공시킬 수 있도록 기원해주시길.



홍아미 - 월간 <2W매거진> 발행인 (conamiga3@gmail.com)






이 글은 월간 <기획회의> 546호 "한국의 잡지들"특집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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