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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미가 Feb 16. 2019

작은 골방의 소녀, 세계와 만나다

내가 여행하는 사람으로 살게 된 이유


작은 방 한 벽면에 커다란 세계지도를 붙이고, 가고 싶은 나라로 상상 여행을 떠나곤 했던 어린 시절을 기억한다. 지도는 오래 접혀 있었던 탓에 구깃구깃해져 있었다. 우리 집이 있을 법한 곳에 빨간 점 하나를 찍었다. 한걸음 뒤로 물러나서 보면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점. 그때 내가 속한 세계는 그 작은 점만도 못했다. 울퉁불퉁한 골목길과 크기와 높이가 제각각인 계단들, 살짝 삐뚜름한 전봇대와 어지럽게 하늘을 가로지르던 전깃줄……. 다섯 개의 방과 다섯 개의 부엌으로 되어 있던 35평 우리 집은 그나마 그 동네에서 잘 사는 편에 속했다. 줄넘기를 할 수 있는 마당도 있고, 장독대 가득한 옥상도 있었으니까. 창호지 바른 미닫이문이 달려 있던 내 방이 가장 작았다. 두 뼘 남짓한 창문을 열면 바로 눈앞에 뒷집 지붕이 보였는데 그 위엔 항상 쓰레기가 굴러다녔다. 가끔은 허겁지겁 지붕을 뛰어다니던 길고양이와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꼭 필요한 사람이 되자.’ 우리집 가훈이었다. 조모와 부모님은 책임감이 강한 소시민들이었으나 평생을 보수적인 가치에 기대어 대가족을 이끌었다. 꿈, 행복, 소망과 같은 말랑말랑한 단어들은 생존, 책임, 도리, 의무와 같은 절대적 가치에 비해 힘이 없었다. 여행은커녕 소풍이나 외식 한번 해본 적이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간혹 사소하게 속을 썩인 일이 있었겠으나 나는 대체로 유순하게 자랐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학교에 갔고, 정해진 시간에 귀가했다. 열둘 즈음부터 항상 설거지를 했고, 아침식사를 물린 뒤에는 어른들의 취향에 맞게 모닝커피를 타서 바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지배가...”로 시작되는 잔소리가 늘 내 뒤꽁무니를 쫓아다녔고, 나는 점점 나의 작은 방 안에 틀어박혔다. 







지난 5월, 홍대 근처에서 열린 제2회 ‘트렁크 책 축제’에서 북콘서트를 했다. 지난해 친구들과 함께 출간한 남미 여행 에세이집 <지금, 우리, 남미>을 가지고 1시간여 수다를 풀어낸 것. 백여 명의 청중들을 앞에 두고 손에 마이크를 쥐는 순간,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동시에 드는 생각.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작은 골방에 틀어박혀 방문 하나 여는 것조차 두려워했던 소심한 소녀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삼십 대 후반, 남부럽지 않은 연륜의 언니가 되어 겁 없이 세계 곳곳을 누비고, 내가 본 세상을 사람들에게 알려줘야겠다며 마이크까지 들게 됐다. 이건 간극이 커도 너무 크지 않은가. 



무엇이 나를 이리 변하게 만들었을까. 그 얇은 미닫이문이 마치 결계라도 되는 것마냥 틀어박혀 책만 파고들던,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 자학하던 소녀를 세상 밖으로 끌어냈을까. 사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여전히 나는 고민이 있을 때마다 책에 기댄다. 자주 못난 짓을 하고 후회하며 곱씹는다. 다만 넓어졌을 뿐이다.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며 내 세계는 계속 넓어지고 있다. 인도로 첫 배낭여행을 떠나 미친 듯이 청춘을 불사르던, 발자국 하나 없는 하얀 눈밭에서 뜨거운 눈물을 뚝뚝 흘리던, 야간열차를 타고 영하의 새벽에 홀로 여수 돌산대교를 건너던, 허니문이라 위장한 채 남편과 하드코어 배낭여행을 즐기던, 지구 반대편 남미의 빙하와 화산, 사막, 고산지대를 누비던. 그 모든 존재가 나다. 




한국이라는 작은 영토에서 여자의 삶에 갇혀 있는 수많은 친구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이렇게 묶었다. ‘그동안 내가 해왔던 모든 여행을 총정리해보겠다’는 야무진 다짐으로 연재를 시작한 게 1년 전의 일이다. 시간이 흐르고 글이 쌓였다. 그 사이 한 살 더 먹었지만, 그래서 억울하지 않다. 

한 평범한 여자의 세상이 여행으로 넓어지고, 원하는 삶에 가까워지는 과정을 충분히 그려냈는지 모르겠다. 대단한 탐험가도 아니고, 유명한 작가도 아닌 나의 이야기가 과연 많은 독자들과 공명할 수 있을지 또한 자신이 없다. 아직도 나는 어리석고, 배워야 할 것이 많은 부족한 사람이고, 더 아름답고 강해지기를 원하는 욕심 많은 사람이다. 

세상의 모든 이들이 나와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있다. 아무렇지 않게 떠나라, 이야기하지만 아무나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를 수 있는 건 아니다. 수년씩 세계 일주를 다닌다는 건 차라리 꿈에 가까운 이야기다. 




여행을 하면서 더욱 일상이 소중해지고, 관계가 넓어지는 경험을 나누고 싶었다. 평범한 관광에 가까운 여행을 즐기는 30대 여자로서, 이걸로도 충분하다는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세상의 모든 여행이 당신 삶의 일부로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그리하여 점점 더 풍요롭고 행복한 인생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내가 바라는 건 그게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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