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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미가 Feb 23. 2019

인도 여행의 추억

너의 언어를 존중한다는 건 너의 세계를 존중한다는 것



기다림은 지루했다. 인도에서는 버스도 기차도 하물며 비행기까지도 연착이 잦았다. 우리는 카주라호에서 잔시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역시나 출발하기로 한 시간에서 두 시간이 지났는데도 버스는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창밖으로 장사꾼들이 오갔다. 몹시 불결해 보이는 주전부리와 짜이 등을 파는 치들이었다. ‘박시시’를 외쳐대는 아이들도 많았다. 기다림만큼이나 익숙해진 풍경에 하품이 쏟아졌다.

지루한 걸 가장 못 견디는 내가 먼저 움직였다. 안전한 버스 안에서 벗어나 시끄러운 장사치들과 탐욕스러운 걸인들의 도가니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갔다. 바나나가 한 다발에 5루피라고 했다. 우리 돈으로 150원 정도. 작은 몽키 바나나였으나 맛은 달았다. 아무 데나 걸터앉아 바나나를 먹고 있는데 i아이들이 들러붙었다. 나 역시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한 백패커였기에 적선해줄 마음은 없었다. 여행자들을 물주로 보는, 공허하면서도 탐욕스러운 눈빛 또한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뒤였다. 아이들은 습관적으로 손을 입에 갖다 대며 ‘적선’을 뜻하는 ‘박시시’를 반복해 말했지만 큰 기대는 없어 보였다. 그저 적선이라는 단어만이 꼬질꼬질한 아이들과 5000km 밖에서 날아온 동양의 대학생들을 이어주는 유일한 연결고리였을 뿐. 



     

더 이상 여행자가 아닌 순간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조금은 권태로운 장난이었을지도. 바나나를 하나 떼어 껍질까지 벗겨서 갓난아기를 안고 있는 남자애에게 건넸다. 그리고 주섬주섬 힌디어 회화 메모를 꺼내 더듬더듬 이름을 묻고, 나이를 묻고 부모님이 있는지 물었다. 

그때부터 아이들은 내가 아는 ‘아이들’이 되었다. 더 이상 우리에게 구걸하지 않고 순진한 눈빛으로 귀를 기울였다. 아이들은 내 말을 알아듣기도 하고 더러는 고개를 젓기도 하며 자신들의 이름을 말했다. 아기를 안고 있는 남자애는 사실 여자애였다. 아이들의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와 손짓에도 나는 아이들의 말을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가지고 있던 물티슈를 뽑아서 아이의 얼굴을 닦아줬다. 더운 날씨에 시원한 느낌이 좋았는지 아이들은 더 달라고 했다. 우리 일행은 그냥 한 통을 다 줬다. 나머지 바나나도 다 주었다.

한참을 그러고 놀고 있노라니 어느새 우리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인도 사람들은 워낙 오지랖이 넓은 민족이었다. 그들은 무슨 일이냐고 묻거나 아무 말 없이 그냥 서서 우리를 구경했다. 우리가 아이들의 말을 못 알아듣고 있으면 통역을 해주기도 했고, 우리의 어설픈 힌디어의 발음을 교정해주기도 했다. 그들은 우리가 웃을 때 함께 웃었다. 그 상황이 우습기도 했고 재미있기도 했다. 장사치들은 더 이상 우리에게 장사를 하지 않았고, 우리는 그들이 우리 곁에 머물도록 내버려두었다.




기다림그리고 헤어짐

버스가 출발 신호를 보냈다. 기다렸던 시간이었으나 아이들과의 헤어짐이 아쉬워 머뭇거렸다. 기념 촬영을 했다. 원래 아이들과 우리 일행들만 찍을 생각이었는데 모여 있던 인도인들이 은근한 눈빛을 보내며 비켜주지 않았다. 같이 찍고 싶냐고 물었더니 냉큼 우리 곁에 섰다. 우리 일행과 아이들, 그냥 지나가던 사람, 바나나 장수, 릭샤왈라, 버스 운전사까지 스무 명도 넘는 인원이 함께 김치-를 외치며 사진을 찍었다. 

여행이 끝난 후에도 그 순간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낯선 조합의 단체 사진을 볼 때마다 묘한 기분이었다. 마치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나오는 인도 현지 사진에 우리 모습이 합성된 느낌이랄까. 우리가 한 일은 그 나라 말로 말을 건 것밖에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흑백사진에 총천연색이 입히고, 평평한 사진이 3D 입체 영상으로 바뀌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 순간, 그러니까 버스가 떠날 때, 다섯 명의 아이들은 나란히 앉아 우리에게 열렬히 손을 흔들었다. 바나나 장수도, 짜이 장수도, 지나가던 인도 사람도. 우린 당신들의 세상에 잠깐 머물렀던 것뿐인데, 어째서 그토록 눈물겨운 작별 인사를 하시나요. 우리는 웃으며 울었다. 아마도 인도 여행 중 가장 감동적인 순간 가운데 하나였으리라. 아주 잠깐이었지만 완벽하게 다른 두 세계가 접점을 만났고 교감했다. 헤어짐이 아쉬웠던 것은 만남이 있었던 까닭이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창밖 풍경이 아쉬울 리 없다. 만남이 없다면 헤어짐도 있을 리 없다. 

상대방의 언어를 안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두 세계를 끌어당겨 이어주는 엄청난 일이다. 여행은 공간을, 언어는 사람을, 그리고 그 만남은 세상에서 가장 의미 있는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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