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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미가 Mar 02. 2019

대책 없이 여행하는 자의 변명

행운이 들어올 수 있게 자리를 비워두는 것 뿐이야

나는 여행 준비를 거의 안 한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라는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보이는 것을 따라가는 여행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 나라에 가기 전 내가 하는 여행 준비라고는 항공권과 첫 숙소, 그리고 대략의 루트다. 



여장부는 용감하다

첫 숙소마저도 정해놓지 않고 떠날 때도 있다. 남편과 함께 떠난 베트남 여행이었을 것이다. 호치민으로 들어가 해안 도시들을 거쳐 하노이에서 아웃하는 보름간의 배낭여행. 늘 그랬듯 남편은 내게 모든 것을 의지한 채 무구했고, 나 또한 비행기 타기 직전까지 바쁜 일을 처리하느라 여행에 설렐 여유가 없었다. 정신차려보니 출국 하루 전. 짐도 안 쌌고 첫 날 어디에 묵을지 생각도 안 했다. 유심칩이라든지 데이터 로밍 준비는 턱도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나 자신이 참 어이없을 정도로 대책 없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은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여장부는 불안을 내색하지 않는 법. 내가 아는 건 호치민 ‘데탐로드’에 저렴한 여행자 숙소가 몰려 있다는 것. 

“플리즈 고 투 데탐로드.”

망설임 없이 택시기사에게 이렇게 말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숙소가 어디냐는 것. 내가 그걸 어찌 아나. 

“아이 돈트 노우. 저스트 데탐로드 애니웨얼 이즈 오케이.”

그리고 살짝 불안해하는 남편을 이렇게 안심시켰다. 

“택시에서 내려서 처음 만나는 삐끼에게 운명을 걸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내가 이렇게 준비성 없는 여행을 하게 된 데엔 딱히 신념이나 여행 철학이 있어서가 아니다. 쉽게 말해 버릇을 잘못들인 거다. 첫 여행지였던 인도는 어떤 계획이나 일정표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곳이었다. 약속은 어기라고 있는 거고, 계획은 무너뜨리라고 세우는 거고. 어이없는 거짓말, 눈에 빤히 보이는 속임수에 정신이 붕괴되지 않으려면 우리도 거기에 동화되어야 했으니까. 

나중에는 2시에 도착하기로 한 버스가 5시에 와도, 

“와, 3시간밖에 안 늦었다.” “그러게 오늘 안엔 못갈 줄 알았는데.”

정당하게 지불한 좌석표를 들고 기차에 탔는데, 아예 자리 자체가 없어도 -그러니까 우리는 8호차에 탑승해야 하는데 이놈의 기차가 1-3호차까지만 온 적이 있었다-

“바닥에 앉아 가면 돼. 그래도 기차가 와준 게 어디야.”

이런 자세를 견지할 수 있게 되었달까. 오늘 할 일이 내일로 미뤄지는 일이 다반사고, 예상치 못한 사건사고로 당장 내일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마당에 계획을 세워 무엇하랴. 그럼에도 여행은 계속 이어지더라는 것. 비어 있는 시간은 채워지고, 즐거운 일, 신나는 일은 끊임없이 벌어진다. 그런 여행의 묘미를 알아버린 이상 모든 스케줄이 꽉꽉 채우고 마치 ‘임무 완수’하듯 해치우는 일은 내게 못할 노릇이 되어버렸다. 



행운은 우리의 편

물론 이러한 대책 없음이 어디에서나 통하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행운이나 귀인을 기대해야할 때도 있다. 역시나 아무런 준비 없이 떠난 터키 여행. 무려 한 달이나 되는 일정이었다. 당시에도 출국 몇 시간 전에야 마감 원고를 보내고 부랴부랴 가방을 쌌을 정도로 준비가 부족했다. 

첫 도시였던 이스탄불에서는 시행착오를 하느라 기운을 다 뺐다. 새벽 비행기로 도착했는데 지하철 운행 시간을 잘못 알아서 추운 데서 덜덜 떨어야 했고, 여행책에서 본 교통카드를 판매하는 곳을 못 찾고 일회용 토큰을 사느라 괜한 낭비를 하기도 했다.  

숙소는 비싼 가격에 비해 시설이 형편없었다. 그때가 성수기였는지 적당한 가격의 숙소를 찾기가 그렇게 어려울 줄이야. 인터넷에서 추천하는 숙소들은 모두 만원이었고, 혹시 몰라 불쑥 들어가본 숙소들은 어이없을 정도로 비쌌다. 결국 숙소를 구하느라 여행지에서의 아까운 하루를 통째로 날려버리고 말았다.

날씨는 왜 그렇게 덥고, 물가는 또 왜 그렇게 비싸던지. 모든 것이 예상과 달랐고 나는 조금씩 지쳐갔다. 무구한 남편은 역시 내 눈치만 보며 지친 걸음을 옮길 뿐. 그렇게 며칠을 허비하고 나니 앞으로 남은 일정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술탄아흐멧 근처를 터덜터덜 걸어가던 그 순간에도 우리는 많이 지친 상태였다. 그저 다음 도시로 가는 버스편이나 알아볼까 싶어 무심코 들어간 로컬 여행사. 우리는 거기서 귀인을 만나게 된다. 

“그 다음 도시는 생각해봤어? 숙소는 예약했니? 페티예에서 패러글라이딩은? 안탈랴에 갈 거야? 크루즈 여행을 한번 해보지 않을래? 모든 예약을 한번에 도와줄 수 있어.”

평소라면 짜증을 유발했을 ‘호객의 언어’들이 어쩜 그리 달콤하게 들리던지. 어쩌면 베테랑 여행사 직원인 제롬은 내게서 지친 여행자의 너덜너덜한 멘탈을 읽어냈는지도 모른다. 나는 홀린 듯이 이스탄불에서부터 안탈랴, 올림포스에 이르는 보름간의 일정을 통째로 그에게 맡기게 된다. 대여섯 도시를 이동하는 교통편, 숙소, 액티비티, 3박 4일 지중해 크루즈 프로그램까지 전부. 몇 년 전 일이라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적어도 200만 원쯤은 그 자리에서 현금으로 지불했던 것 같다.(현금이 모자라 ATM에서 뽑아오기까지 했으니까) 제롬은 그 자리에서 여기저기 전화를 걸고 예약을 해서 보름치 일별 스케줄과 각종 바우처, 영수증을 쫙 뽑아주었고, 언제든 문제가 생기면 전화를 하라고 했다. 

사무실을 나오는데 어안이 벙벙했다. 그렇게 충동적으로 여행을 ‘구입’한 건 처음이었으니까. 뒤늦게야 ‘이거 사기면 어째? 숙소 찾아갔는데 이런 예약 없다 그럼 어째?’하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다행히 행운의 여신은 내 편이었다. 터키는 역시 관광의 천국이었다. 숙소는 우리가 직접 구하는 것보다 훨씬 급이 높았고, 지중해 위에서 한가롭게 보낸 3박 4일 크루즈도 대만족이었다. 인당 백 몇 십만 원에 보름 동안이나 그토록 편안한 여행을 할 수 있었다는 게 감사할 정도로. 게다가 사람들은 어쩜 그리 친절한지. 낯선 도시에 도착할 때마다 우리는 항상 도움의 손길을 먼저 내미는 현지인들을 만났고 단 한 번도 사기인 적이 없었다. 

물론 단순히 운이 좋았을 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내 여행을 미리 꽉꽉 채우지 않은 덕분에 운이 들어올 수 있는 자리를 내어준 게 아닐까. 물론 이것은 대책 없이 여행하는 자의 비겁한 변명일 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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