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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미가 Apr 27. 2019

날씨가 아름다움을 망칠 수 없어

날씨와 여행의 상관관계



     날씨가 여행에 미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물론 내가 날씨를 조종할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체념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기껏 뛰놀 준비를 마쳤는데, 우중충한 하늘에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한기를 머금은 바람에 뒷골이 뻣뻣한 날엔 우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게다가 한 여행지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야 며칠이 고작인 보통 여행자들에게 날씨운이란 여행의 질을 결정하는 바로미터이다.



자칭 날씨의 여신이 된 이유

언젠가부터 나는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날씨가 좋을 거야. 좋아야 해. 내가 여행하는 동안 그 며칠만이라도. 나는 날씨운이 좋은 사람이니까. 일기예보에 아무리 빗금이 죽죽 그어져 있더라도 그렇게 주문을 걸고 나면 왠지 빗금 사이로 해가 빼꼼 나올 것만 같았다. 

그게 습관이 되었던 걸까. 제주도 게스트하우스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 아주 진지하게 얘기를 하고 말았다. 다음날 온갖 워터 스포츠를 예약해놓았는데 비 소식을 듣고 걱정하던 그에게 이렇게 말했던 거다. “걱정하지 마요. 나랑 있으면 비 안 와. 내가 날씨운이 엄청 좋거든.”

어렵게 휴가를 내 혼자 제주 여행을 왔다는 H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는지 “언니는 날씨의 여신이에요!” 하며 바로 숭배 모드로 들어갔다. 속으로는 좀 찔렸지만, 주문을 걸 때는 1%라도 의심하면 부정 탄다는 말을 되뇌며 짐짓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천만다행으로 다음날 날씨는 환상적이었다. 구름이 많이 끼긴 했으나 해를 적당히 가려주어 야외활동을 하기에 더없이 좋았다. H와 나는 하루 종일 ‘업’된 상태로 스노클링, 서핑, 패들보트, 선탠 할 것 없이 온갖 액티비티를 함께 즐겼다. 아름다운 바다와 완벽한 날씨, 유쾌한 여행 동무. 이 정도면 여행을 위한 모든 것이 갖춰진 셈이 아닌가. 더불어 ‘날씨의 여신’이라는 별명까지 얻었으니 일석이조다. 다음날 아침, 제주도를 떠날 때가 되자 갑작스런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H는 열렬한 신도에 가까운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변화무쌍하기에 더 아름다운 것이 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누군가가 늘 그렇게 생각해주니 계속 그럴 것 같았다. 휴가로 떠난 태국에서도 나의 날씨운은 계속될 줄 알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난데없는 폭우가 쏟아져 택시에서 내리지도 못한 채 망연자실하기도 했고, 모처럼 마음먹고 도전한 스쿠버다이빙 여행에서도 바람 때문에 파고가 높아 보트 출항이 취소되기도 했다.(그 때문에 푸켓까지 가서 야심차게 도전한 어드벤스드 다이버 자격증은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그러므로 날씨가 여행에 주는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다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여행을 망한 여행이라 결론지어버릴 수 있을까. 여행에서 날씨를 바라보는 관점이 조금 바뀌게 된 계기가 있는데 베트남 북부 산악도시 사파를 여행할 때였다. 

높은 산맥 사이에 자리 잡은 고산 지역인 사파 일대는 기상 환경이 독특한 편이다. 다른 베트남 지역에 비해 시원한 덕분에 여름철에는 휴양지로 각광받는다고 하지만, 정작 그에 걸맞은 화창한 날씨를 보기는 어려운 지역이다. 물론 산허리께까지 내려온 구름으로 장관을 이루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흐린 하늘과 짙은 안개로 10m 앞도 구분하기 힘들다. 해발 3000m가 넘는 판시판 산 정상은 더더욱 그렇다.  

우리가 간 날도 그랬다. 숙소를 나설 즈음 잔뜩 찌푸린 하늘이 불안하긴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케이블카 매표소에 도착하니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판시판 산에 도착할 때 즈음엔 아예 폭우로 변해 있었다. 작은 우산 하나로 둘이 버티기엔 무리다 싶어 결국 우비 사서 입고, 젖은 몸을 감쌀 두툼한 가디건까지 하나 구입했다.  

3134m 정상에 도달했다가 능선을 따라 설치된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길이었다. 구름 사이로 엄청난 장관이 펼쳐졌다. 어느새 빼꼼 해가 고개를 내미는가 싶더니 다시 새파란 하늘이 점점 영역을 확대해나가기 시작했다. 몸도 말랐고, 세상은 더 선명해졌고, 기분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중턱에 있는 커다란 절에 다다르자 내리쬐는 햇볕에 땅도 거의 말라 있었다. 경내를 산책하다보니 베트남 현지인들이 원형으로 둘러앉아 찰밥과 생오이를 펼쳐놓고 열심히 먹고 있었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구경하는 여행자가 배고파 보였던 걸까. 이리 오라는 손짓에 사양 않고 가서 한 손엔 찰밥을, 다른 한 손엔 즉석에서 슥슥 깎은 오이 한 덩이를 들고 소금에 찍어먹고 있는 나. 절경으로 둘러싸인 고산에서 현지인들과 함께 쪼그려 앉아 밥을 얻어먹고 있는 상황이 우습기도 하고, 그저 이 시간이 즐거워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게 무슨 상관인가. 배부르게 먹고 멋있는 세상 구경하면 됐지. 

문득, 여행 전 베트남 여행 정보 사이트에서 본 사파의 날씨에 대한 이야기가 기억났다. 

 “여름철에 사파를 방문하면 단 하루 만에 사계절을 모두 느낄 수 있다. 아침이나 오후에는 봄, 가을 날씨처럼 시원하지만, 한낮에는 여름 날씨로 돌아와 볕이 뜨겁고 구름이 드리워지기도 한다. 저녁에는 서늘하다. 여름철 한낮에는 우레를 동반하지 않은 짧은 폭우가 쏟아지기도 한다. 비가 지나간 뒤 무지개가 걸린 사파는 환상적인 느낌이 가득한데, 이로 인해 이 곳은 수년간 시적 영감의 원천이 되어왔다.”

실제로 우리가 판시판을 방문한 몇 시간 동안 날씨는 천변만화했다. 바람이 불다가 비가 오고, 검은 구름이 잔뜩 끼었다가 삭 비켜나고 눈부신 햇빛이 내려쬐다가 다시 어두워지고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일희일비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나중에 숙소에 돌아와서 찍은 사진을 정리하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폭풍우 속에서 젖은 머리카락을 얼굴에 잔뜩 붙인 채 우비를 입고 바보같이 소리치고 웃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었다. “이 사진들은 절대 남한테 못 보여주겠네” 했지만, 그 또한 그것대로 즐거운 기억이었음이 분명하다. 

세상은 아름답고, 우리가 사는 동안 날씨는 만 가지로 변화무쌍하다. 비 오는 날엔 비를 맞고, 햇살 눈부신 날엔 온기를 만끽하고, 바람 부는 날엔 옷깃을 여미면 될 뿐이다. 날씨는 변화무쌍한 것이 당연한데, 그걸 가지고 아름다운 세상을 부정할 순 없다. 



다시 사람 사는 세상으로 내려오는 길. 다시 무거워진 구름 때문일까, 고산지대에서 잔뜩 얻어먹은 찰밥 덕분일까. 든든해진 뱃속에 괜히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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