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지 않았던 이름들

슬픔은 남겨도 진실은 남기지 않는다

by 피터팬


서울 외곽, D구역 관저. 이른 아침.


김경태는 커튼을 젖히지 않은 채 방 안에 서 있었다.

해가 뜬 지 오래였지만, 불은 켜지지 않았다.

손에 쥔 보고서가 아주 천천히,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구겨져 갔다.


“태오 상태는?”


경호실장의 목소리는 낮고 단정했다.


“정신적으로는 안정됐습니다.

기억 삽입은 완벽했고, 외상은 없습니다.

병원도, 차량도, CCTV도 모두 정리됐습니다. 언론은... 아예 접근조차 못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목소리가 아주 잠깐 갈라졌다.

“누군가 옆에서 죽었는데, 우리 아들은 아무 기억도 없다는 거냐?”


실장은 답하지 않았다.


책상에 던져진 보고서에는 한 문장이 굵게 인쇄되어 있었다.


“시나리오 2-B.

대상자 무관한 민간인 단독 자살 사건.

매듭 완료.”


김경태는 느리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신 이런 일 없어야 해.

지금부턴 외부 노출 전면 금지다.

동선 통제하고, 경호 이중 배치해.

태오는... 사람이 아니라 정보로 관리해. 알겠나?”


“네. 곧바로 실행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오래 전 받은 카드 한 장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백색 무지 카드.

아무 글자도 없고, 손끝에만 느껴지는 미세한 양각 문양.


‘W’


“...그쪽엔 감사 표시 하지 마.

그런 거... 전해지는 구조가 아니잖아.”


서울 강북의 조용한 장례식장, 오후 늦은 시간.

영정 사진 앞에 흰 국화가 놓였다.

오은주, 서른셋.

조용히 살아왔고, 조용히 사라졌다.


장례식장은 붐비지 않았다.

소수의 지인들과 가족 몇 명.

그리고,

이름을 남기지 않은 남자 한 명.


그는 조용히 향을 올렸다.

검은 정장의 셔츠 단추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은 사람.

무릎을 굽히고, 오래도록 머리를 숙였다.


그가 떠나기 직전, 은주의 어머니는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죄송한데, 어디서...”


그는 아주 가볍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냥, 그 아이를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건네진 회색 봉투 하나.

두 손으로 쥐었을 때 묵직한 느낌이 났다.


열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안에는 1억 원.

발신자 없음.

계좌도, 이름도, 단서도 없다.

단지,

"조용히 보내세요"라는 메모 한 줄만 들어 있었다.


다음 날, 서울 유림초등학교.

3학년 2반 교실 문이 열리자 아이들이 잠시 고개를 들었다.

새로운 교생 선생님이 들어섰다.


밝은 표정, 조용한 걸음, 교탁 앞에서도 말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들과 눈을 맞췄고, 낮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이수진.


화이트팀 사후관리 모듈 T-3 소속 요원.

이번 임무는 교육 실습 교생으로 위장하여 초등학교에 투입된 것.

실질적 목적은 단 하나.


시나리오 2-B.

은주의 자살로 위장된 교통사고 사건.

완벽하게 덮였다고는 하나, 직계 가족 중 미성년자가 존재했다.


오지은. 아홉 살. 사망자의 여동생.


시스템은 아이의 상태를 "불완전 변수"로 판단했다.

어린아이는 충격을 인지하지 못한 채

우회적인 행동, 정서적 불안정, 예기치 않은 발화를 통해

사건의 잔재를 드러낼 수 있었다.


이수진의 임무는 명확했다.

지은의 상태를 확인하고, 연결 고리를 제거하며,

필요하다면 그 흔적을 지워야 했다.


첫 주, 지은은 말이 없었다.

책상 앞에 앉아 창밖만 보았고,

그림 시간엔 종이 한 장을 오래 만지기만 했다.


이수진은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다.

단지 매일 같은 시간에 옆자리에 앉아

같은 색연필을 꺼냈고,

지은과 똑같은 방향으로 선을 그었다.


그건 '말을 건다'는 것의 다른 방식이었다.


둘째 주, 그림 시간.


지은은 파란색 사각형을 가득 칠했고,

그 안에 하얀 옷을 입은 뒷모습 한 명을 그렸다.


“이건 누굴까?”

이수진이 조용히 물었다.


“...언니요.”


“그럼 지은이는?”

“...여기.”


지은은 손가락으로 파란 바닥을 짚었다.


이수진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 옆에 점 하나를 그렸다.

아이의 감정은 살아 있었고,

공포가 아니라 이해로 향하고 있었다.


그날 밤, 보고서엔 이렇게 적혔다.

사망자 존재 인식 확인됨
공포 반응 없음 / 정서적 재배치 진행 중
직접 발화 無 → 외부 확산 가능성 낮음
관찰 지속


셋째 주.


이수진은 쉬는 시간 틈을 이용해

지은이 자주 얘기 나누는 아이 둘과 대화를 나눴다.


“지은이는 좀 조용하지?”

“응. 근데 잘 웃어. 가끔은... 그냥 혼자 웃어.”


그 말 한 줄이 중요한 단서였다.

공포나 불안이 아니라

내면에서 일어나는 조용한 정리.

아이의 세계가 균형을 찾아가고 있다는 징후.


보건 교사, 담임과의 티타임,

가정통신문 속 대화 반응까지

이수진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모든 정보를 수집했다.


그녀는 감시자가 아니었다.

균열을 메우는 사람.

조용히 감정이 무너지지 않게 지탱해주는,

시스템 속의 작은 인간이었다.


21일째 되는 날.

종례 시간.

아이들이 마지막 인사를 하던 순간,

지은은 맨 마지막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에 접힌 물방울 모양 색종이를 들고

선생님에게 조용히 건넸다.


그 안엔 삐뚤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선생님, 웃는 거 가르쳐줘서 고마워요.”


이수진은 종이를 받아들고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 아이의 기억 속에

자신이 ‘기억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작은 파문처럼 흔들렸다.


그날 밤, 임시 숙소.

이수진은 단말기를 켜고,

최종 보고서를 천천히 작성했다.


작전명: 시나리오 2-B / 사후관리 T-3 모듈
관찰 대상: 오지은 / F, 9세 / 사망자 오은주 직계
위장 신분: 교생 실습생 / 21일 간 활동

정서 안정률: 92.4% 도달
우회 발화 無 / 직접 연결 언급 無
사회화 정상화 / 감정 반응 안정
관계 확산 가능성 없음 → 이탈 유도 완료

진단 코드: F43.21β / 경미한 적응 반응군
추가 개입 불필요 / 종료 조건 충족

*작전 종료 요청 및 요원 철수 승인 요청


보고를 전송하고 단말기를 닫은 뒤,

이수진은 한참을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손끝은 멈췄지만, 눈동자는 아직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우리는 누군가의 기억을 대신 살아주는 게 아니야.

현실이 무너지지 않도록 유지하는 거지.”


그리고 다음 날

그녀는 다시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돌아갔다.


화이트팀 서버, 최종 기록.


“존재하지 않았던 교통사고.

단독 자살로 종결된 여성.

기억을 제거한 남자.

감정 조율 후 이탈 유도된 아동 1명.

전파 위험 없음.

사건 종료 및 봉인 처리 예정.”


그날 이후,


은주의 이름도,

그 밤의 사고도,

지은의 그림 속 뒷모습도

어디에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화이트팀은 알고 있었다.

기억은 지워질 수 있어도,

현실은 조율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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