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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거리 덕분에

멀어져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by 피터팬


떨어져 지낸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많은 걸 바꿔놓는다.

처음엔 뭐든 어색했고,

뭐 하나 익숙해질 것 같지 않았다.


근데 진짜 이상하게도,

익숙해지더라.


‘보고 싶다’는 말도

예전처럼 매일 하진 않는다.

안 보고 싶은 게 아니라,

그 말을 습관처럼 쓰고 싶지 않아서.

매번 말하면 가볍게 느껴질까봐,

그게 싫었다.


그리운 건 똑같다.

오히려 더 커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지,

어느 순간부터는 ‘보고 싶다’보다

‘고맙다’는 말이 자꾸 떠올랐다.


같이 살 땐 정말 몰랐다.

아내가 해주던 일들이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를.


퇴근하고 현관 열었을 때 불이 꺼져 있으면

괜히 집이 더 추워 보이고,

씻으라고 잔소리하던 그 목소리도

이젠 생각나면 웃음이 난다.

라면 끓여놓고 “먹어” 한 마디 던지던 것도

그땐 시큰둥했는데

지금은 괜히 울컥할 때가 있다.


고맙고,

미안하고,

그리고 그립다.


싸울 일이 진짜 줄었다.

예전엔 별것도 아닌 걸로

투닥투닥,

누가 더 힘들었네, 말투가 왜 그랬네 하며

서로 예민했던 적도 많았다.


지금은 그런 거 없다.

말 한 마디, 표정 하나도

아깝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가끔은

“우리가 떨어져 있어서 더 잘 지내는 거 아냐?”

하는 생각까지 든다.


이상하지?

멀리 떨어져 있는데,

사이가 더 좋아졌다.


혼자 있는 시간은

처음엔 정말 버거웠다.


주말엔 빨래 돌리고,

마트 가서 고양이 간식 사고,

저녁은 라면이나 냉동볶음밥으로 대충 때우고.

그러다 누워 있으면

아, 나 진짜 혼자구나 싶을 때가 있다.


근데 그게

늘 외롭기만 한 건 또 아니다.


이상하게도,

그 시간 동안

내가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었다.

별거 아닌 일들 하나하나가

내 삶을 내가 책임지는 법을 가르쳐줬다.


아내가 없어서 허전하긴 해도,

그 빈자리에 괜히 기대지 않게 됐다.


그리고,

이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사랑은

멀어진다고 줄어들지 않는다.


자주 못 보니까

더 자주 생각나고,

영상통화로 얼굴 보면

웃는 표정 하나에도 마음이 훅 무너질 때가 있다.


메시지 하나,

사진 한 장에도

하루가 몽글몽글해지는 날들이 있다.


보고 싶다는 말,

이젠 안 해도 서로 다 안다.


가끔은 그런 생각도 든다.


사랑이란

늘 옆에 있어주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멀리 있어도

“나는 네 편이야.”

이 한 마디를

진심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라고.


아직도 아내는 서울에 있고,

나는 여전히 이 제주에서

고양이들 밥 챙기고,

빨래 개고,

하루를 살아간다.


가끔은 진짜 너무 멀게 느껴지고,

어떤 날은 그냥

바로 옆방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상하지?

그 거리 덕분에

우리는

조금씩 달라졌고,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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