곶자왈 숲에서 길을 잃는 건, 가끔 우리가 먼저가 아닐 수도 있다.
휴가를 맞춘 건 6월 중순이었고,
그건 고사리 장마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때였다.
비는 내려야 할 걸 내려서 땅을 눅눅하게 적셨고,
숲은 그걸 삼키고 더 깊어졌다.
혜원과 나는 오래된 약속처럼
이 시기에 제주에 오기로 했다.
대학 시절 이후로 각자 일에 치이다
딱 일 년 만에 다시 얼굴을 보게 된 여행이었다.
우린 서귀포 외곽, 숲에 둘러싸인 펜션을 예약했고,
비 내리는 날씨를 다 알고도 강행했다.
“비 오니까 좋다.”
혜원이 창문을 열며 말했다.
빗소리가 나무에 부딪혀 부드럽게 들렸다.
“서울 장마는 그냥 축축한데,
여긴 이상하게 조용해서 좋네.”
우린 그날 아침,
펜션 사장님이 준 커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눴다.
사장님은 물었다.
“곶자왈은 가보셨어요?”
“아뇨, 오늘 처음요.”
“요즘은 고사리 채취하러들 많이 들어가는데…
장마철에는 길 헷갈릴 수 있어서 조심하셔야 해요.
지도에도 안 나오는 갈림길이 종종 생기거든요.”
그 말에 혜원이 눈을 반짝였다.
“재밌겠다. 길 없는 데 걷는 거 좋아하잖아.”
나는 웃으면서도 가볍게 받아넘겼다.
“우비 입고 조금만 걷다 나올 거예요.
고사리 꺾을 것도 아니고.”
오후 세 시쯤,
비가 잦아든 걸 보고 우리는 우비를 챙겨 나섰다.
초입은 나무 데크로 이어진 순한 길이었고,
익숙한 산책코스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숲으로 깊이 들어설수록
길은 흙으로 바뀌었고,
비에 젖은 이끼와 진한 습기가 피부에 찰싹 들러붙었다.
“냄새 좋다.”
혜원이 말했다.
“곶자왈 냄새 같아.”
나는 코끝으로 깊게 공기를 들이마셨다.
진흙, 나무껍질, 고사리, 이끼, 그리고 오래된 물.
“제주 향수로 만들면 이럴 것 같지 않아?”
“으흠, 그럼 진짜 비 오기 전 공기처럼 생겼을 듯.”
우린 그렇게 말하면서
길이 이끄는 대로 천천히 걸었다.
처음엔 사람이 만든 순환로 같았지만,
어느 순간 갈림이 나왔다.
왼쪽은 평평하고 넓은 길,
오른쪽은 풀이 우거져 인적이 없어 보이는 좁은 길.
“오른쪽으로 가볼까?”
혜원이 물었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GPS를 켰다.
화면은 ‘위치 신호 없음’을 반복했다.
지도가 멈춰 있었다.
“지도 안 잡혀.”
“그래도 순환코스면 어디로든 돌겠지.”
우리는 그렇게 오른쪽 길을 택했다.
풀숲 사이를 조심히 걷다 보니
신발은 금세 젖었고,
우비 속 옷도 축축하게 등판에 달라붙었다.
비는 오지 않았지만,
숲 안은 비보다 더한 습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30분쯤 걸었을까.
우린 동시에 멈춰 섰다.
“야,
이 고사리 무리... 아까 봤던 거 아냐?”
“저 파란 리본도 똑같은 데 있던 거 같은데...”
“우리 지금... 같은 자리 돌고 있어?”
나는 숨을 고르며 고개를 돌렸다.
혜원과 눈이 마주쳤다.
“길 잃었나 보다.”
그 말을 뱉고 나서야
뭔가 바뀌었다는 걸 실감했다.
소리가 사라졌고,
바람이 멎은 듯했고,
나무들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우린 더 말하지 않았다.
무겁게 발을 옮겼고,
점점 안으로 들어가는 느낌만 들었다.
한참을 헤매다
우린 넓은 바위무덤 같은 곳에 앉아 쉬기로 했다.
숨을 몰아쉬며 물을 꺼내 마셨고,
말은 거의 없었다.
그때였다.
저쪽에서 발소리도 없이 누군가 다가왔다.
회색 우비를 입은 노인이었다.
70대쯤 돼 보이는 마른 체형.
모자에 눌린 머리,
그리고 등에는 고사리가 반쯤 찬 허름한 가방 하나가 메어져 있었다.
“사람이 있었구먼.”
그가 말했다.
우린 동시에 일어났다.
“혹시... 길 잃으셨어요?”
“예.
고사리 좀 꺾으러 들어왔는데…
날이 궂어서 그런지 길이 잘 안 보이더라고.
길 따라 나오면 될 줄 알았는데,
계속 돌고 있네요.”
목소리는 차분했고,
말투는 담담했다.
우린 자연스럽게 그를 받아들였다.
같은 처지, 같은 느낌.
“같이 나가요.”
혜원이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우린 셋이서 걸었다.
그는 말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길을 돌아보면 늘 한 걸음 뒤에 있었다.
고사리가 담긴 가방만 덜렁거렸다.
한참을 걸었을 때,
그가 말했다.
“여기 조금만 보고 올게요.
혹시 샛길이 있을지도 몰라서...”
우린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덤불을 젖히고 조용히 사라졌다.
10분.
20분.
우린 부르기도 했고,
주변을 다시 확인하기도 했지만
그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있던 자리는 흙이 눌려 있었지만
어디로 발을 옮겼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마치 그 자리에서 스르르 지워진 듯.
우린 더 이상 숲에 머물 수 없었다.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30분쯤 더 걷다 마을 밭길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찾았고,
그대로 민박집까지 돌아왔다.
그날 밤,
우린 파출소에 전화를 걸었다.
"곶자왈에서 길을 잃었는데,
같이 걷던 노인이 사라졌어요.
회색 우비 입고, 고사리 든 가방 메고 계셨어요...”
경찰은 차분하게 질문했고,
기록을 남긴다며 우리 말에 귀를 기울였다.
며칠 뒤,
혜원에게 연락이 왔다.
“너 지금 통화 돼?”
“왜, 무슨 일인데?”
“그때...
같이 걷던 그 노인 말이야.
경찰이 다시 확인했대.
작년에 곶자왈에서 실종됐던 분이래.
고사리 꺾으러 들어갔다가...
한참 뒤에 발견됐었대.”
“뭐라고?”
“옷도 똑같고,
가방도... 고사리 반쯤 찬 그 그물 가방도.
경찰 말로는, 그 분...
이미 작년에 돌아가셨다고 했어.”
한참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혜원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근데 있잖아...
그 할아버지,
우리보다 먼저 길을 잃은 것처럼 보였잖아.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우릴 먼저 데려나가려고 했던 것 같기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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