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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굿판에서 만난 가족

억새바람이 불던 가을밤, 굿판에만 나타나는 가족

by 피터팬


제주에 내려온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같이 지내던 선배가 말했다.


“이번 주말에 마을 굿판 선다는데, 너 같이 좀 가자.

외숙모가 아픈데 굿을 해야 한다네.”


나는 처음엔 사양했지만,

“외지 사람이 제주를 제대로 보려면 굿판을 봐야지”라는 말에

못 이기는 척 따라갔다.


억새가 은빛으로 출렁이는 가을 저녁,

바람은 산허리를 타고 내려와 천막을 집어삼킬 듯 흔들었다.
나는 외지인이라는 걸 온몸으로 의식하며,

차갑게 젖은 흙바닥 위에 앉았다.


천막 안은 이미 달아올라 있었다.
쇠북 소리가 내 가슴뼈를 울렸고,

돼지머리와 술, 향 냄새가 한데 뒤섞여 코를 찔렀다.


사람들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는데,

나는 오히려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무당이 첫 소리를 뽑아내는 순간, 공기가 가라앉았다.
북소리가 멀어지고, 그때 내 눈앞에 낯선 가족이 보였다.


앞머리가 젖어 얼굴 절반을 가린 여인,
그 옆에서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들썩이는 아이 둘,
그리고 뒤에서 굽은 등을 하고 선 남자.


나는 그들을 똑똑히 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웃음과 잔 돌리는 손길 사이에서,

그 가족은 마치 투명한 막에 갇힌 듯 고립되어 있었다.


억새가 바람에 날려 들어왔다.

내 무릎 위에 잎사귀가 쌓였는데,

그 가족 위로는 단 한 줄기도 내려앉지 않았다.
바람이 그들만 비껴가고 있었다.


그때부터였다.
북소리가 멀어지고, 아이들의 눌린 숨소리가 점점 커졌다.
귓불에 닿는 듯한 축축한 호흡.
내 숨과 겹쳐, 멈출 수 없는 리듬이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무당이 칼춤을 돌리며 불빛이 튀는 순간
눈을 깜빡인 찰나, 그들은 사라졌다.


사라진 자리에 남은 건 젖은 발자국.
그 위로 억새 잎이 굴러들어왔다.
그런데 내 귀에는 여전히,

아이들의 숨소리가 박자처럼 들려왔다.


굿이 끝나고 술자리에 섞였다.
나는 선배를 붙잡고 물었다.


“앞줄에 있던 가족, 못 봤어?”


그는 술에 취한 듯 웃으며 말했다.
“무슨 가족? 거기 우리 친척밖에 없었는데?”


나는 말을 멈췄다.
옆자리 노인이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잔을 내려놓았다.


“그 집 식구들은... 억새 날리던 가을에 뱃길 나섰다가 다 물에 삼켜졌제.
묻히지도 못했으니, 굿판이 서야만 자리 찾으러 온다.”


노인의 말이 떨어지자, 주위는 잠시 고요해졌다.
사람들은 웃음소리를 멈추고,

마치 아무 말도 듣지 못한 것처럼 다시 술잔을 돌렸다.

나는 식은땀에 옷이 달라붙는 걸 느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억새밭이 어둠 속에서 한꺼번에 흔들렸다.
그 소리는 바람이 아니라, 아이들의 숨소리 같았다.


한 번, 두 번, 내 호흡에 맞춰 들려왔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뒤에서 또렷하게 작은 발자국 소리가 흙길을 밟았다.


돌아보았을 때,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억새만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집 문을 열고 들어서도,

내 등 뒤로 바짝 붙은 숨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마치 굿판에서 따라 나온 그 가족이,

아직 내 호흡을 빌려 살아 있는 것처럼.







책에 수록될 괴담은 독자 여러분의 실제 경험,

전해들은 이야기, 혹은 오래된 전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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