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건 공백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흔적들이었다
돌아보면, 참 많은 날들이 있었다.
처음 혼자 밥을 차려 먹던 날.
국은 데워놨는데, 숟가락을 들자
마음이 턱 하고 내려앉았다.
예전에는 식탁 위가 늘 북적였는데,
그날은 내 앞에 그릇 하나뿐이었다.
처음 가계부를 써보던 날.
200만 원이라는 숫자가 눈에 꽂히는데,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살면서 돈을 못 써본 건 아니었지만,
혼자 책임져야 한다는 게
이렇게 무거운 일인 줄 몰랐다.
구직 사이트를 켜두고
대답 없는 시간과 씨름하던 날들.
메일함을 수십 번 열어보면서도
결국 돌아오는 건 고요뿐이었다.
그렇다고 늘 혼자만 있던 건 아니다.
아침마다 전화기로 들려오던 목소리.
서울 지하철 소음 사이로 스며드는 아내의 말,
제주 바람 소리와 겹쳐 들리던 순간들.
“오빠 잘 잤어?”
“오늘 뭐 할 거야?”
짧은 물음이었지만, 그게 하루를 시작하게 해줬다.
멀리 있으니
오히려 더 자주 챙기게 된 안부.
택배 상자처럼, 작은 말 한마디가
하루를 버티게 해주는 날도 많았다.
물론 쉽지만은 않았다.
아무 일도 없는데,
괜히 눈물이 나는 날도 있었다.
조용한 거실에서 억지 웃음이 흐르는 TV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웃음보다 더 큰 외로움이 밀려올 때.
그럴 땐 그냥,
“머함?” 하고 톡 한 줄 보냈다.
별거 아닌데,
그 한 줄이 기묘하게 마음을 붙잡아 줬다.
우리가 함께 찍은 사진들,
결혼식장에서 나란히 앉아 있던 기억.
공항 게이트 앞에서
짧은 뽀뽀로 작별을 세던 순간.
그 모든 게 쌓여
지금의 우리가 되었다.
멀리 살아도
거리가 우리를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 거리가 있어야
볼 수 있었던 것들도 있었다.
빨래를 개다가
예전에 아내가 접던 방식이 문득 떠올랐다.
티셔츠 소매를 정리하다가
“이건 아내가 하던 방식인데” 하고
혼잣말을 하며 웃음이 났다.
현관 앞을 지키던 고양이의 눈빛.
각자의 도시에서 동시에 켜둔 전등 불빛.
거리는 우리 사이를 벌려 놓기도 했지만,
그 안에 우리만의 방식을 심어 주기도 했다.
이제는 안다.
우리가 살아온 이 시간들이
실패도, 불완전도 아니라는 걸.
그저 서툴렀을 뿐,
서로를 지켜낸 날들이었다는 걸.
사랑은 조금 다른 모양으로 남았지만,
끝내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