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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남추녀 Aug 21. 2015

멧돼지가 내려왔다

전건우

  겨울, 멧돼지가 내려왔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고 경찰과 119 구조대원들이 그물을 들고 멧돼지를 쫒기 시작했다. 한 마디로 난장판이었다. K와 나는 학교 구내식당에서 TV를 통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K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연신 “어머, 어머”를 뱉어냈다. K와 나는 친구였다.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고 대학까지 같은 대학 같은 과에 들어가게 된, 늘 붙어 다녀도 소문 한번 나지 않는 그야말로 ‘쟈스트 후렌드.’ 


  “불쌍해서 어떻게 해! 저게 다 밀렵꾼들이 멧돼지를 도시 쪽으로 몰아서 그런 거야.” 


  K는 멧돼지가 생포되는 걸 보면서 끝내 눈물 한 방울을 흘렸다. 멧돼지는 도시 근교의 동물원으로 보내질 거라는 아나운서의 말을 뒤로하고 뉴스는 끝났다.      


  원체 착한 마음을 가진 K는 나와 친구가 돼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는 K를 처음 만난 고등학교 때부터 ‘쟈스트’를 빼고 ‘걸’을 집어넣거나, ‘후렌드’를 빼고 ‘러버’를 넣고 싶었다. 하지만 ‘쟈스트’와 ‘후렌드’는 내 연약한 몸으로 빼내기엔 너무 깊고 무거웠다. 


  그래서 나는 혼자서 K를 사랑했다. 


  저릿한 통증 같은 사랑이었다.      


  한 달 후, 멧돼지 한 마리가 더 내려왔다. 겨울의 끝물을 알리는 마지막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이었다. 이번에는 K에게서 소식을 전해 들었다. 신난 표정이었다. 


  “들었어? 이번에 내려온 멧돼지는 암컷이래. 신기하지? 지난번 멧돼지랑 이번에 내려온 멧돼지랑 애인 사이 같지 않아? 사람에게 붙잡힌 남자 친구를 돕기 위해 도시로 내려온 여자 친구. 멋지다!”      


  다음 날 신문을 보니 한 달 전에 잡혀서 동물원으로 보내진 수컷 멧돼지 우리에 이번에 잡힌 암컷을 함께 넣을 거란 기사가 조그맣게 실려 있었다. K의 말이 사실이라면 둘은 꽤나 행복하겠구나 싶었다. 


  그때쯤 나는 K를 피하고 있었다. 힘겹긴 했지만 혼자서 휠체어를 밀고 혼자서 밥을 먹었다. 


사진 @ 손구용


  “내가 너하고 평생을 같이 있을 것도 아닌데 나도 혼자서 뭐든 해 봐야지.”라고 웃으면서 말했지만, 멧돼지의 삐죽한 엄니처럼 나는 날카롭게 슬펐다. 


  K는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한참 바라보다 말없이 돌아섰다. 


  그리고 겨울방학이 시작됐다. 나는 겨울방학 동안 내내 습지 식물처럼 어두운 방안에서만 지냈다. 햇살의 기억을 잃어가듯 K에 대한 헛된 기억이 점점 퇴색되기를 바랐지만, 그러기엔 겨울방학은 너무 짧았다.      


  새 학기가 시작된 봄,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K를 만났다. 교정에는 개나리가 수줍게 피어 있었다. K는 개나리보다도 환한 미소를 짓더니 다짜고짜 내 휠체어를 밀기 시작했다. 


  “나 방학 동안에 운전면허 따고 차 샀어. 같이 갈 곳이 있으니까 따라와.” 


  싫다는 내 말을 무시하고 억지로 차에 태운 K는 세상에서 제일 긴장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는 도시를 빠져나갔다. 초보운전이라고 쓴 종이가 축제의 깃발처럼 나부꼈다. 


  K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동물원, 그중에서도 멧돼지 우리 앞이었다. 우리 안에는 부부로 보이는 큰 멧돼지 두 마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 두 마리 사이로, 너무 연해서 보기만 해도 눈물 날 것만 같은 노란색 줄무늬를 가진 아기 멧돼지 여섯 마리가 잠을 자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지난번에 잡혀 왔던 멧돼지들이 아기를 낳았단 기사를 보고 너랑 보러 오고 싶었어. 둘이 애인 사이였을 거란 내 말 맞지? 남자 친구를 위해서 암컷 멧돼지가 내려왔다는 내 말 맞지?”      


  나는 말없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는데, 그때, 내 손등 위로 뭔가가 떨어졌다. 그녀의, 눈물이었다. 그녀는 말없이 눈물을 흘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그녀의 눈물 너머로 사랑 가득한 그녀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 순간 나는, 그녀 앞에서 한 명의 남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무거운 내 몸도 돌처럼 딱딱한 내 혀도 새파랗게 살아 숨 쉬는 내 마음을 막지 못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뒤틀린 입을 움직여 세상에서 가장 하기 힘든 말을 내뱉었다. 


  “싸아 라앙 해에.” 


  “나도, 사랑해.” 


  그녀의 목소리가, 그녀의 미소가 봄바람처럼 살랑거렸다. 어느새 잠에서 깬 아기 멧돼지들이 우리를 바라보며 꿀꿀거리기 시작했다. 


  도시로 내려온 멧돼지처럼 그렇게 사랑이 내게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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