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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남추녀 Jul 08. 2015

청춘, 지나가다

전건우

스무 살에 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단 하나, 소니에서 나온 중고 워크맨만이 유일한 내 소유였다. 


일본에서 막노동을 하던 아버지가 사 온 은색의 워크맨은 테이프를 재생할 때마다 끼릭끼릭 힘겨운 소리를 냈는데, 나는 그게 늘 안쓰러웠다. 


스물한 살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여전히 워크맨을 빼고는 가진 게 없었고 그 가난은 스물두 살 때도 그대로였다. 


햇빛이 잘 들지 않는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월급의 대부분은 아버지 약값으로 나갔다. 내게는 병아리 눈물만큼의 용돈이 떨어졌다. 


나는 그 돈으로 짜가 테이프를 사곤 했다. 90분짜리 최신가요나 발라드 명곡 모음 같은 것들을 워크맨에 넣고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들었다. 


강물 위로 노을이 내렸고, 가끔 몇 마리 새들이 날아가기도 했다.   


K를 만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우리는 연애를 했다. 자글자글 잡음이 들어가 있는, 금방이라도 늘어질 것 같은 연애. 짜가 테이프 같은 연애였다. 


우리는 서로를 듣고 또 들었다. 


딩동딩동 퇴근 종이 울리면 나와 K는 옷을 갈아입고 공장 입구에서 만났다. 그러고는 손을 잡고 어둡고 긴 계단을 지나 지상으로 함께 나왔다. 그럴 때면 하품처럼 길고 느린 햇살이 우리를 비추곤 했다. 


그 따뜻한 햇살 속에서 나는 한 마리 흐물흐물하고 투명한 해파리가 되어 K를 사랑했다.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마음 또한 사랑했다. 


하지만 긴 저녁 그림자처럼 우리의 가난은 여전했다. 깜짝 놀랄 만큼 가난한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용케도, 죽지 않고. 


“편지 써 주세요.”


K는 남자가 써 주는 편지를 받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편지는 가진 것이 없어도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었다. 


나는 퇴근길에 편지를 썼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모나미 볼펜에 ‘후후’ 바람을 불어가며, 노을이라든지 새들에 대해 썼다. 


사진 @ 손구용


가끔은 형편없는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워크맨으로 들었던 노래들이었다.


어느 날인가는 함께 개기월식을 지켜봤다. 잔업을 끝내고 나오는 길이었다. 신기할 정도로 크고 둥근달이 지구의 그림자에 서서히 잠겼다. 언젠가 함께 놀러 갔던 동해 바다의 밀물처럼 잔잔하고 느린 잠김이었다. 


이윽고 달이 사라졌을 때, 그리하여 가로등 하나가 뻐끔거리는 골목길이 어둠에 휩싸였을 때, 우리는 함께 탄성을 질렀다.


“우와.”


청춘은 참으로 예민해서 우리는 소소한 일들에 감동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사랑을 질기고 튼튼하게 만들었다. 


언젠가 한 번은 직접 녹음한 테이프를 K가 선물로 줬다.


“제가 좋아하는 노래들을 모았어요.”


“고마워.”


나는 K의 선물을 워크맨에 넣고 이어폰 한 짝을 나눠 낀 다음 함께 노래를 들었다. ‘오래전 그날’이 흘러나왔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예요.” 


K가 속삭였다.


교복을 벗고 처음으로 만났던 날.

그때가 나도 가끔 생각나지.

뭐가 그렇게도 좋았었는지.

우리 둘만 있으면…….


좋은 노래였다. 워크맨은 끼리릭끼리릭 더 힘든 소리를 냈다. 바람이 욱신욱신 불었다. 지구 대기에 산란된 태양빛이 노을로 변했다. 


우리는 그 장엄한 순간을 함께 했다. 


그런 날들이 구름처럼 지나갔다. 


그렇게 가난하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날들이.


“우리 사이는 이 워크맨 같아요.”


어느 날, K가 말했다. 여느 때처럼 함께 노래를 듣던 중이었다. 내 왼쪽 귀와 K의 오른쪽 귀가 가느다란 이어폰으로 연결돼 있었다. 


“이 워크맨처럼 힘겹게, 힘겹게 돌아가다가 언젠가 멈춰 버릴 것 같아요.”


나는 왠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디선가 몰래 숨어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어둠이 성큼 찾아왔다. 


나는, 그러고 보니 많은 시간이 지났구나, 하고 생각했다. 꽤 많은 편지를 보냈고, 함께 바라본 노을이 무척 깊었구나, 생각했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가진 게 아무것도 없구나,라고도 생각했다.


“헤어져요.”


K는 사라져 가는 햇빛처럼 작고 아슬아슬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사이가 아직 노을처럼 아름다울 때 헤어져요,라고. 


시간이 흘렀다. 


시간은, 흐른다. 


나는 왜냐고 묻지 않았다. 언제부터 우리 사랑이 비켜나기 시작했는지, 결국 사랑은 개기월식처럼 완전히 하나였다가 다시 멀어지는 것인지, K에게 묻지 않았다. 


K는 얼마 후 공장을 그만뒀다. 나도 그만뒀다.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워크맨은 끝내 고장이 났다. 


“오늘 난 감사드렸어.” 부분에서 갑자기 멈추더니 테이프를 씹고 놔주지 않았다. 


그 후에도 나는 얼마 동안 고장 난 워크맨을 들고 다녔다. 영원히 멈춘 노래가 자꾸만 귀에 들렸다. 


강물 위로 노을이 내렸고, 가끔 몇 마리 새들이 날아올랐다.


그렇게, 청춘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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