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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남추녀 Sep 17. 2015

굿바이 썸머

전건우

  그녀는 복숭아를 좋아했다. 


  연분홍빛의 말랑말랑하고 향긋한 복숭아를 들고 있을 때면 그녀는 여름 햇살보다 환하게 웃었다. 


  복숭아를 싸들고 모기장 하나만 든 채 우리는 기숙사 옥상으로 올라갔다. 이를 테면, 그곳은 우리의 비밀 아지트였다. 


  여름방학 동안의 학교는 한산했다. 


  늙다리 복학생들이 이유도 없이 교정을 어슬렁거리기는 했지만 그것도 낮 최고 기온이 34도를 넘어가면서 뜸해졌다. 


  급기야 계절 학기가 끝나고부터는 후텁지근한 바람만이 학교 안을 맴돌 뿐이었다.


  “우리, 학교 탐험을 해 보면 어떨까?”


  어느 날 그녀가 말했다. 


  모기장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슬슬 지겨워지던 참이었다. 샛노랗고 커다란 물탱크 아래 설치한 모기장에 앉아 있으면 제법 시원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이란 뻔했다.


  복숭아 먹기, 음악 듣기, 책 읽기, 수다 떨기, 그리고 가끔 뽀뽀.


  “그래. 좋아.”


  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그녀와 함께라면 뭐든 좋았다. 그 무렵의 나는 그랬다. 삶의 그물 가득 그녀가 걸려 있었다. 도무지 다른 것들이 섞여 들어갈 틈이 없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첫사랑이었다. 


  첫사랑이라는 단어가 주는 불길하면서도 치명적으로 아름다운에 취한 채 나는 그녀를, 그녀는 나를 사랑했다. 


  우리는 둘 다, 스무 살이었다.


  인적이 끊긴 학교는 여름 내내 울다가 바싹 말라죽은 매미 같았다. 


  우리는 공과대학 건물 복도에 서서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말없이 바라봤다. 그녀도 나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너무 조용해서 이상해.”


  아주 긴 시간이 흐른 후 그녀가 말했다.


  학기 중의 공과대학 건물은 늘 시끌벅적했다. 정체모를 기계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누가 로봇이라도 만들고 있는 게 아닐까? 동기 중 누군가는 그런 농담도 했다. 


  조용히 내려앉아 꾸덕꾸덕 말라붙은 정적은 쉽게 깨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우리는 2층으로 올라갔다. 


  복도에 걸린 시계는 멈춰 있었다. 


  자판기가 위잉, 낮은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어딘가, 아주 멀리서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복도 양 옆으로 사물함이 가득 늘어선 2층 복도는 한낮인데도 무척 컴컴했다. 여기가 이렇게 어두웠던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맞잡은 우리 손은 어느새 땀으로 축축해졌다.


  “어쩐지 우울한 느낌이야.”


  그녀가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름의 뒤편이라고나 할까?”


  내가 말했다.


  여름의 뒤편, 이라고 그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사진 @ 손구용

  

  “화장실 다녀올게.”


  그녀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3층 탐험을 막 끝냈을 때였다. 교수님들의 연구실이 있는 3층 역시 조용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지나다녔다. 조교 형들과 누나들이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서는 유령처럼 복도를 떠돌았다.


  다음은 도서관 건물로 할까.


  나는 또 다른 탐험 장소를 머릿속에 그려봤다. 도서관도 좋지만 음대 건물도 매력 있을 것 같았다. 빈 연습실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 


  그런 시시껄렁한 상상을 하고 있을 때 바로 정면에 보이는 강의실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에 강의실이 있었던가?


  한 학기 동안 열심히 학교를 다녔건만 한 번도 보지 못한 강의실이었다.


  나는 살며시 강의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의자가 계단식으로 쫙 펼쳐진 대강의실이었다. 여름 내내 꽉꽉 들어차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웠을 성마른 열기가 내 얼굴을 향해 훅 달려들었다. 


  그것 말고는, 그러니까 텁텁한 열기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책상과 의자, 휑뎅그렁한 교탁, 그리고 그 사이를 부유하는 먼지. 창문을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먼지의 진로를 밝히고 있었다. 


  고요했다.


  방금 전까지 들리던 매미 울음이 자취를 감추었다.


  불과 한 달 전까지 이곳에서 학생들이 앉아 꾸벅꾸벅 졸거나 몰래 스마트폰을 보면서 강의를 들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웅성웅성 소음이 들리고, 늙은 교수의 헛기침 소리가 들리고, 불시에 울린 전화벨 소리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갑자기 아득해졌다.


  강의실에는 세월이 쌓여 있었다.


  아니, 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무언가가 늦여름의 어느 날 오후, 그곳에, 그 강의실에 도사리고 있었다.


  “뭐해?”


  그녀가 내 어깨를 잡으며 그렇게 묻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울었으리라.


  “그냥. 여긴 어떤가 싶어서.”


  “으응. 난 또 괜히 놀랐잖아. 너, 뒷모습만으로도 꽤 심각해 보였거든.”


  그녀는 볼에 바람을 불어넣으며 말했다.


  “우리……그냥 옥상으로 돌아가면 어떨까?”


  내가 말했다.


  “왜?”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봤다.


  “그러고 싶어. 모기장 안에서 한없이 게으르게 시간을 보내고 싶어. 내일 같은 건 생각도 하지 말고. 언젠가 이 여름이 끝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모기장 안에서 마치 끝나지 않을 것처럼 오늘을 보내고 싶어.”


  흐음. 


  그녀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계단을 이용해 로비로 내려왔고 태양의 은총을 듬뿍 받아 열광적인 신도처럼 춤을 추는 아지랑이를 뚫고 우리의 비밀 아지트, 옥상의 모기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로 여름이 끝났다.



  영원할 것만 같은 순간들이 있다. 도무지 끝을 상상할 수 없는 순간.


  내게는 그해 여름이 그랬다. 그녀와 모기장, 그리고 가끔 부는 바람만 있으면 내내 여름이 계속될 것만 같았다.


  나는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갔다. 


  그녀와는 그전에 헤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사소한 이유였지만 당시에는 지구의 한 축을 짊어진 것 같은 괴로움을 선사하는 크나큰 고민이었다. 


  어쩌면 나는 그 여름날 빈 강의실을 봤을 때 이미 이별을 예감한 건지도 모르겠다.


  아니, 아마 거의 그럴 것이다.


  나는 무언가가 떠나간 자리를 목격했고 그것이 곧 우리 모두의 운명이라는 아주 거창한 결론에 도달했다. 그 짧은 순간 말이다.


  첫 번째 휴가를 나와서(그때도 여름이었다) 나는 우리의 아지트로 향했다. 샛노란 물탱크는 변함이 없었지만 모기장은 어딘가로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엔 모기장 따위는 없었다는 듯이. 


  이제는 그녀의 이름조차 희미하지만 나는 가끔 그 시절의 여름을 생각한다.


  그러면 제일 먼저 모기장이 떠오르고 그 빈 강의실이 뒤를 잇는다.


  그해 여름은 무척 뜨거웠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서서히 물러났다.


  모든 사라지는 것들이 그렇듯 겸손하게, 고요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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